27화. 물 밖과 물속의 경계(8)
아이리스는 아르카어 배우기를 즐겼다. 빌도 이제 아퀘이레어를 조금씩 읽을 줄 알게 되었다. 아직까진 레이카의 통역이 필요했지만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그림으로 채웠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니 레이카가 없을 때에도 대충 의사를 전달하는 정도는 됐다. 그러나 여전히 하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이렇게 된 사정을 말할 수준은 아니어서였다.
게다가 빌이 그걸 믿을지도 미지수였다. 육지 인간에게 아퀘이레의 존재는 허무맹랑한 것이었다. 레이카가 넌지시 흘린 말에 반응한 것만 봐도 그랬다.
"네가 육지에서 살았어서 하는 말인데, 아퀘이레라고 알아?"
"아퀘이레? 어디서 들었는데……. 혹시 퀘이르를 말하는 거야?"
공교롭게도 아르카에 퀘이르라는 지역이 있었다. 아르카 최서단으로 세인트와의 국경과 맞닿은 곳이었다. 빌은 그곳이 쥐렌 남작가의 영지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수도인 아르헨과 비교하면 페올라와는 많이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빌이 그곳을 아예 모르긴 힘들었다.
레이카는 일단 부정하지 않았다. 비슷한 지명이라도 있는 게 어디냐며 스스로 합리화를 했다.
"응, 맞아. 거기서도 꽤 시골이라 방언이 좀 세."
"하긴, 세인트 근처라 거기 말이랑 좀 섞였을 수도 있겠다."
빌은 그렇게 이해하는 듯했다. 레이카가 안도하는 사이, 빌은 다시 의심을 시작했다.
'그런 것치고 글자가 많이 다르단 말이지.'
다른 외국어를 공부하지 않은 게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할 줄 몰랐다. 그래도 최소한 사용하는 알파벳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이작이 언어 쪽에 관심이 많아 몇 번 책을 찾는 걸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발음이나 단어가 다르면 달랐지 글자까지 다를 순 없다는 게 빌의 생각이었다.
'아이작이 있었으면 물어라도 봤을 텐데.'
그렇다고 직접 퀘이르까지 가서 확인할 수는 없었다. 빌에겐 그럴 만한 돈과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아퀘이레어는 퀘이르 지역 방언으로 둔갑했다.
어느 밤, 아이리스는 문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그녀는 잠귀가 밝은 편이었다.
거실로 살금살금 나오니 부엌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빌이 주전자를 올린 채 멍하니 탁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아이리스가 나타난 걸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깼어?"
아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에 수첩과 펜이 없었다. 빌은 예/아니오로만 대답이 나올 말만 하기로 했다.
"여기서 지내는 건 괜찮아?"
"……." (괜찮아.)
"괜찮은 것 같으니 다행이네. 혹시라도 불편한 거 있으면 말해."
"……." (알았어.)
물이 끓기 시작하는지 보글보글 소리가 났다. 빌은 자리에서 일어선 뒤 찬장에서 차를 꺼냈다.
"너도 한 잔 줄까?"
"……." (아니.)
"잠이 안 오면 이걸 마시곤 해."
빌은 잔에 찻가루를 넣었다. 찬장에 차 봉지를 넣는 사이 물이 다 끓었다.
아이리스는 빌의 앞에 있던 신문에 눈길을 가져갔다. 일주일마다 보급품과 함께 오는 까트리에 신문이었다. 1면의 반 이상을 차지한 기사가 있었다. 아이리스가 이해하기엔 어려운 단어였다.
물을 담아 온 빌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이리스가 기사를 가리켰다.
<윌리엄 드 조이 아르데니아 왕자 저하의 파혼>이라고 적혀 있었다.
"왕자님이 파혼을 했대."
"……."
"세인트 왕비님이 돌아가시면서 그렇게 됐대. 왕비를 시해할 정도의 불안한 나라와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없다나 뭐라나."
낮에 왕자의 파혼 기사를 읽은 빌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2년 전 이맘때쯤, 왕자의 약혼 기사와 해변에 떠밀려 온 신원불명의 남성 시신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마침 아이작에게서 연락이 없어 불안감에 수소문을 했다. 그리고 결국 아르헨의 거리 어딘가에서 죽었다는 비보를 전해 들었다.
이 기사를 읽으니 아이작의 기일이 다가왔음이 실감났다. 밀레이 모녀의 소식이 끊긴 지도 오래였다. 그들은 아이작의 죽음을 여전히 기리고 있을까?
아이리스는 빌이 조용히 차만 마시는 걸 바라봤다. 그의 표정이 왜 어두운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잠자코 그의 손등에 자기 손을 얹었다.
"왜?"
"……."
"뭔지 몰라도 마음은 안정되네.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빌이 손을 뒤집어서 손바닥이 맞닿았다. 그가 손을 쥐자 아이리스는 몸이 뜨거워졌다. 차가운 물에 빠진 것도 아닌데 왜 이러는지 몰랐다.
아이리스의 금안과 제대로 마주쳤다. 빌은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동그랗고 커다란 눈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녁 먹은 게 잘못되었나?'
바라볼수록 심장의 떨림만 거세질 뿐이었다. 빌은 손을 놓고 남은 차를 마저 마셨다.
"들어가서 자. 난 이거 치우고 잘게."
아이리스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빌은 그녀가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했다. 이상하게도 그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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