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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오래오래/레이스타인

세인트 3. 로레인가의 소년들(4)

by 슬기옥 2021. 11. 28.
55화. 로레인가의 소년들(4)



 

"영애가 내 시녀가 되는 건 어떤가?"

"그렇게 되면 가문의 영광이죠."

 

 

앨리스 역시 켈리의 시녀 후보로 올랐으나 로레인가가 멸문하면서 자연스럽게 물러났다.

 

켈리는 앨리스를 곁에 두고 감시하는 게 속편할 것 같았다. 그녀는 로레인가와 가까우면서 사교계 소식을 가져다줄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럼 다음 사교 모임이 열리면 루이넬 영애는 소양을 더 쌓고 오라고 대신 좀 전해주게."

"완전히 쳐내시려는 건가요?"

"영애에게도 기회는 가야지."

 

 

둘 중 누구에게서 그런 소문이 퍼졌을지는 충분히 짐작되었다. 앨리스는 부채를 거두고 미소띤 얼굴을 내밀었다.

 

마침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켈리는 입을 다물었다. 앨리스가 문을 열었다. 조지는 그녀가 문앞에 있자 놀란 눈치였다.

 

 

"문을 왜 네가 열어?"

"너 손 없잖아."

"우리 집인데 뭐. 앉아. 차가 없어서 커피 탔는데 괜찮지?"

"차 없는 줄 알았으면 가져올걸."

"됐어. 생수 마시면 돼. 차를 대접할 손님도 없고."

 

 

한때 약혼했던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켈리는 둘의 대화도 다르게 들렸다. 둘만 있을 땐 점잖던 앨리스가 조지에게는 사근사근하게 굴었다.

 

사촌이라는 관계를 무시할 순 없었다. 그럼에도 왠지 신경 쓰였다.

 

켈리는 조지가 컵과 접시를 놓는 것을 보았다. 쿠키는 공작가 주방에서 직접 구운 것이었다. 조지가 먼저 한 개 먹었다. 켈리도 먹었다. 머랭이 입 안에서 녹았다.

 

 

"음, 집에서도 해 먹고 싶은 맛이야."

"그래? 내가 자주 갖다줄게."

"괜찮아. 사장님께 배워 볼까?"

 

 

켈리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석에 앉은 조지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난 먼저 들어가지."

"그래."

 

 

애초에 이 자리에 끼는 것이 아니었다. 로레인가에 여자가 있다는 불미스러운 소문 나든가 말든가!

 

켈리가 나가자 응접실이 조용해졌다. 앨리스는 커피를 호록 마시고 물었다.

 

 

"너 영주님한테 너무 무례한 거 아니야?"

"어차피 우리는 죽은 거나 다름없어서 고소도 못 해."

 

 

쿠키를 녹여 먹던 앨리스가 훗 하고 웃었다.

 

 

"저 분은 무슨 사정이 있어서 여기 계신대?"

"나 없을 때 무슨 얘기를 한 거야?"

"본인에게 직접 묻기는 실례잖아. 꽤 귀티 나는 아가씨 같던데?"

"자작가라고 하더라. 우리 또래인 거 보면 자작 영애 같아."

 

 

자작가라는 말에 앨리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교회에 안 나간 게 겨우 2년인데 조지는 귀족사회에 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신흥귀족이라 모르는 수준이 아니라 이 나라의 공주가 아닌가!

 

 

"하루에 얼마나 있다 가는 거야?"

"아니, 같이 살고 있어. 여기 어디가 좋다고 한 달이나 있겠다는지 모르겠어."

"아, 같이…… 사는구나."

 

 

성 구스타브 거리가 공주의 소유로 넘어갔다는 건 앨리스도 몰랐던 일이었다. 왕실 재무대신인 미에르 공작이라면 알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도 이곳에 오기 전날에야 안 사실이었다. 앨리스는 적어도 켈리가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같이 산다는 말까진 안 하지 않았나?

 

 

"온 지는 얼마나 됐어?"

"열흘 정도 됐나? 한참 더 지난 것 같은데 의외로 별로 안 지났네."

 

 

조지는 쿠키를 까드득 씹었다. 다시 실내가 고요해졌다. 앨리스는 입을 움직이지 않았다. 조지가 침묵을 깼다.

 

 

"외부 사람이 오니 소란해져서 그런가?"

"남자애들만 보다가 또래 여자애가 들어오니까 좋지? 나보다 예쁘지 않아?"

 

 

앨리스의 짓궂은 농담에 조지는 대답을 피했다.

 

 

"외부의 자극이 필요했나봐. 그래서 아르바이트도 하는 거겠지."

"조지."

 

 

두 사람의 푸른 시선이 마주쳤다. 앨리스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우리 집에 양자로 들어와."

"안 돼."

"너만 오라는 거 아니야. 그리고 굳이 우리 가문이 아니더라도 아버지 쪽 친척도 계시고……."

"너희 가문이 받을 멸시는 생각 안 해? 너희가 공작가가 아니었다면 진작 비슷한 꼴 났을 거야."

 

 

앨리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는 다 마시지도 않았다. 쿠키가 절반 정도 남았다.

 

조지가 현관까지 배웅했다. 앨리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싱긋 웃었다.

 

 

"다음에 또 올게."

"오지 마. 너만 곤란해져."

"친척인데 못 올 게 뭐야."

 

 

그녀가 대문으로 가는 것을 보며 조지는 문을 닫았다. 그는 문에 머리를 기댔다가 다시 응접실로 돌아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내려온 켈리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갔는가?"

"불편했지? 미안해."

"자네 친척인 것을 어쩌겠나."

 

 

조지는 남은 커피를 모조리 마셨다. 켈리는 슬쩍 쿠키를 집어먹었다.

 

 

"마저 먹을래?"

"아니, 됐네."

 

 

조지가 다과상을 치우는 것을 보며 켈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애가 내 얘기를 하고 다니진 않겠지?"

"걔 입 무거워. 괜찮아."

"그치만 로레인가에 외부인이 살고 있다는 건 상당히 민감한 사항이 아닌가?"

"이제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 없어. 그리고 당신 여기 영주라며. 뭐가 걱정이야?"

 

 

그가 부엌으로 갔다. 켈리는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살아남은 일곱 형제가 사는 저택은 섬이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