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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오래오래/레이스타인

카르멘 1. 어린 남작(7)

by 슬기옥 2022. 12. 25.
81화. 어린 남작(7)



 

백작가 영식에게 뭐 하나 시키는 것도 안 된다며 글로리아는 끝내 대걸레를 내주지 않았다. 카를이 끈질기게 따라붙자 결국 글로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넌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물론 귀한 몸으로서 청소 같은 일에 동원된 적 없는 카를에게는 당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건 가주가 직접 걸레질을 하지 않을 때 얘기였다. 귀족이 몸소 뭔가를 닦는다면 식사 중 입가에 묻은 음식물이나 방에 둔 난초 잎에 앉은 먼지뿐일 것이다.

 

 

"아니, 그래도……."

"이것만 정리하고 갈게. 크렌슈타인 영식을 응접실로 안내해줘."

 

 

근처에 있던 하인에게 카를을 맡긴 글로리아는 옷까지 갈아입은 뒤에야 응접실로 향했다. 먼지 냄새가 나는지 확인한 뒤 들어선 글로리아는 그제야 친구와 마주앉을 수 있었다.

 

 

"오래 기다렸지?"

"이 차가 생소해서 뭔지 탐구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어."

"이번에 리우에서 새로 들여온 차야."

"리우? 엄청 멀리서 왔네."

 

 

찻주전자에 담긴 찻잎 향이 낯설었다. 바다 건너 온 찻잎이라 다르다고 카를은 생각했다.

 

 

"현지에서는 녹차라고 해. 여기서는 어떤 이름으로 유통할지 생각 중이야. 차는 누가 준비했니?"

"제가 내왔습니다."

 

 

주방 보조인 데일이 손을 모으고 서 있다가 허리를 살짝 숙였다. 글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방법을 빨리 잘 익혔나 보구나. 잘했어."

"설마 차만 유통하는 건 아니지?"

"곁들일 디저트도 좀 들여왔는데, 네가 먹고 있는 그거."

"신제품을 나한테 시험해 보고 있는 거야?"

"우리끼리는 한 번씩 다 먹어봤어. 국내 시장 반응이 제일 중요하지."

 

 

카를은 마시고 있는 차가 씁쓸하게 느껴졌다. 열네 살이 시장 반응을 알아서 뭐한단 말인가. 유행을 좇아 이것저것 눈독들일 나이에 글로리아는 몇 수 앞을 봐야 했다. 유행을 선도할 고위 귀족의 눈을 사로잡을 상품을 찾아야 하는 아르민 상회의 주인.

 

카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글로리아가 순진한 얼굴로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래서 맛이 어때?"

"내 입맛엔 괜찮아."

"그럼 집에 한번 가져가 봐. 좀 챙겨줄게."

"그러면 고맙지."

 

 

크렌슈타인 백작가 정도면 신제품 홍보에 적당한 매개였다. 그 집안 사람들의 명성이라면 분명 공작가와 왕실에도 소식이 전해질 터였다.

 

찻잔을 내려놓은 카를이 화제를 전환했다.

 

 

"곧 생일인데 갖고 싶은 거 있어?"

"그걸 벌써 물어봐?"

 

 

귀족 사회에서 귀한 선물은 몇 달 전부터 준비하기에 벌써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글로리아도 곧 그것을 깨닫고 카를이 뭐라고 하기 전에 덧붙였다. 얼마나 대단한 걸 주려고 그러는지.

 

 

"딱히 없어."

"하긴 아르멘탈리 남작님이야 외국 출장 갔다가 눈에 띄는 게 있으면 바로 사면 되니까."

"그건 내가 갖고 싶은 게 아니잖아."

 

 

글로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같이 웃던 카를이 곧 진지하게 디저트를 포크로 찍었다. 글로리아의 설명에 의하면 쌀가루를 반죽해 증기에 쪄낸 음식이라고 했다.

 

문득 글로리아가 뭔가 생각난 듯 무릎을 쳤다.

 

 

"아, 나 생일이면 뭐 해야 해?"

"작위를 받고 첫 생일인데 당연히 연회를 열어야지."

 

 

글로리아의 생일은 늘 집에서 가족끼리 챙겨왔다. 게오르그는 데뷔탕트 이후에는 다른 가문을 초대해서 대접해야 한다고 일렀다. 그날은 자신에게 맞는 인맥을 다질 기회 중 하나라고.

 

 

"연회를 열어? 그럼 누굴 부르지?"

"가볍게 학교 다닐 때 친구 먼저 시작해 봐."

"난 그 애들이 보낸 초대장에 응하지도 못했는데, 와줄까?"

 

 

작위를 받은 뒤로는 웬만한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탓이었다. 집사장의 권유로 몇 번 나갔는데 전부 피곤한 기억뿐이었다.

 

피치못할 사정이 있을 땐 그냥 못 간다고만 하기엔 미안해서 선물을 보내긴 했지만, 역시 사람이 직접 오는 게 더 좋은 법이었다.

 

 

"일단 보내기라도 해 봐. 그럼 그중에 한 명은 오겠지."

"1왕자님한테도 보낼까?"

 

 

뜻밖의 발언에 카를은 흠칫 놀라 떨리는 손으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1왕자라니, 남작 생일 연회에 가당키나 한 손님인가? 왕족이 백작보다 낮은 계급의 귀족 연회에 참석한 일은 어느 역사에도 없었다.

 

글로리아는 왕족이면 최고의 인맥 아니냐며 웃었다.

 

 

"네가 1왕자님은 어떻게 알고 보낸다는 거야?"

"나 작위 받을 때 다니엘 님이랑 잠깐 대화했거든. 먼저 간다니까 두 번째 춤을 청하고 싶었는데 아쉬우시대."

"그럴 성정이 아닌데……. 인사치레겠지."

"나도 알아. 아직 두 달이나 남았으니까 천천히 생각할래."

"두 달밖에 안 남은 거야."

 

 

두 사람은 몇 달 전 카를의 생일이 어땠는지 곰곰이 생각하며 빈 종이에 목록을 써내려갔다. 심지어 이번에는 글로리아가 작위를 받고 첫 생일이었다. 가주로서 맞는 생일은 분명 남달라야 했다.

 

 

"그래도 1왕자 초대는 너무 남다르지 않냐고. 2왕자면 모를까."

"2왕자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는데 무슨. 난 그분 이름도 몰라."

"에스카르고 탈리히 데 아힐."

"역시 크렌슈타인 백작가 정도는 되어야 2왕자 이름까지 꿰는구나. 아무튼 2왕자쯤은 남작 탄신연에 초대할 만하다 이거야?"

"그 정도로 만만하다는 건 아니고, 일단 초대장을 보내보기라도 해 봐."

 

 

글로리아는 카를이 일러주는 대로 철자를 적었다. 형이든 동생이든 참석할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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