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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오래오래/레이스타인

카르멘 5. 남작, 그리고 리아(5)

by 슬기옥 2024. 9. 17.
113화. 남작, 그리고 리아(5)



 

2왕자 탄신연 당일, 세 사람은 비장한 얼굴로 마차에 올랐다. 1왕자가 보낸 마차는 글로리아 혼자 타기엔 너무 넓어 아서와 바이올렛도 동승하게 했다.

 

세 사람을 배웅하러 나온 사용인들 모두가 휘황찬란한 마차를 보며 감탄했다. 마차가 신기한 건 메리와 실비아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왕실 마차구나."

"넵튠이시여……."

 

 

실비아가 저도 모르게 모국어로 신을 찾았다. 엘리나에서 항해를 나가기 전 바다의 신 넵튠에게 기도하는 신앙의 연장선이었다. 바다신의 가호를 육지에서 찾는 언니를 보며 바이올렛이 코웃음을 쳤다.

 

 

"언제적 넵튠 신이야?"

"이렇게 좋은 마차를 보내주시니 감읍하다고 전해 드리렴."

"그럴게요."

 

 

왕실 마차는 남작가의 마차보다 넓고 편안했다. 하얀 표면과 금빛 창틀, 세세하게 조각된 표면은 귀빈을 위한 것임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렇게 푹신한 의자는 처음이라며 바이올렛이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대체 1왕자가 누구길래 너에게 이런 마차를 보내주시니?"

"친분이 조금 있어요."

"그러니까. 어디서 어떻게 만나서 아는 사이야? 우리끼리 있으면 좀 말해줘도 되지 않아?"

 

 

글로리아는 이번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바이올렛과 아서의 따가운 시선에도 대단한 기밀인 양 꾹 다물었다.

 

기밀이긴 했다. 대놓고 말할 만큼 대단한 친분도 아니니까.

 

글로리아가 계속 말을 돌리자 바이올렛도 지쳐 대화를 포기했다. 몸을 안정적으로 받치는 의자에서 졸던 바이올렛은 문득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아, 나도 모르게 졸았네."

"아직 멀었어요. 더 주무세요."

"어찌 됐건 1왕자님이 보내주신 마차잖아. 그분께 감사하며 구석구석을 봐둬도 모자랄 판에 잠이 든다고?"

"그렇게까지 감사하지 않아도 돼요."

"네가 어떻게 알아? 1왕자님께 물어봤니?"

 

 

1왕자를 지칭하는 바이올렛의 어투가 잠깐 공손해졌다. 글로리아는 일단 그냥 두기로 했다.

 

아르멘탈리 남작령에서 수도 왕성까지 가는 데 시간이 좀 걸릴 터였다. 아서와 바이올렛이 피곤해서 잠든 동안, 글로리아는 생각에 잠겼다. 4일 사이에 그녀에게 닥친 많은 일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헤집었다.


1월 24일 오후, 글로리아는 카를의 급한 연락을 받고 퇴근 후 서둘러 저택으로 향했다. 응접실에 들어가니 카를이 심각한 얼굴로 찻잔을 막 내려놓은 참이었다.

 

 

"웬일이야?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리아."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글로리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그와 친해진 이래로 이렇게까지 긴장된 분위기로 있은 적이 없었다.

 

카를은 잠시 숨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왕자비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왕자비라니? 나랑 너무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도 안 해봤어."

"그럼 지금 한번 생각해 봐. 너 지금 생활에 만족해?"

 

 

카를이 뭘 알고 말하는 것 같아 글로리아는 무릎에 올린 손가락을 오므렸다.

 

 

"그럼, 난 내 일이 좋아. 애초에 남작이 어떻게 왕자비가 되겠어?"

"아르민 상단은 너에게 무슨 의미야?"

"정말 소중한 사업체야. 처음엔 어렵고 막막한 유산이었는데, 지금은 내 전부가 되었어."

"그렇게나 소중하면 상단이나 작위를 지키고 싶겠네?"

"당연하지!"

 

 

이런 뻔한 소리나 하려고 왔을 리 없었다. 글로리아의 눈에서 열기를 느낀 카를이 마침내 굳은 결심을 한 듯 말했다.

 

 

"1왕자가 너와 약혼하려고 해."

"어?"

 

 

당사자도 아닌 사람에게 듣는 자신의 약혼은 낯설었다. 다니엘이 드디어 자신의 약혼 사실을 공표하기라도 한 것인가? 사교계에 그 소식이 퍼졌다면 저택에 편지가 수십 통은 와야 했다.

 

 

"왕자비가 되면 작위고 상단이고 다 내려놔야 해. 왕자비로서 의무도 있으니 상단 일과 병행하기 어렵거든."

"네가 그런 건 어떻게 알아?"

"너 지금도 상단 노리는 놈들 많지? 운이 좋아서 아직 안 망했을 뿐이지, 경험도 적은 어린애가 계속해서 잘할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너희 상단을 호시탐탐 노린단 말이야."

 

 

실제로 글로리아가 거래하면서 나이로 무시당한 적이 많았다. 그녀가 원가와 시세를 모를 거라고 생각해 덤태기를 씌우려는 사기꾼을 몇이나 치안대에 넘겼다.

 

글로리아는 자기 몫으로 나온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누가 들으면 왕실에서 우리 상단 노리는 줄 알겠다?"

"1왕자가 아르민 상단을 노리고 있어."

"뭐, 뭐라고?"

 

 

아까는 다니엘이 그녀와 약혼하려 한다더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 치마를 쥔 글로리아의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렸다.

 

 

"1왕자님이 우리 상단을 왜?"

"네가 왕자비가 되면 왕실에서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상단을 뺏고 자금 세탁용으로 쓸 거야."

"너, 너 이런 걸 어디서 들었어?"

"직접 들었어."

 

 

카를이 탁자에 물건 하나를 놓았다. 글로리아가 전날 선물한 커프스 단추였다.

 

 

"네 선물을 이렇게 쓰게 돼서 유감이다."

 

 

커프스 단추를 누르자 둘 사이에 화면이 떴다. 카를의 얼굴이 다니엘의 얼굴로 덮였다.

 

 

-네게 걸맞는 탄신연 선물이라면, 아르민 상단 정도는 되어야 할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냐? 네가 아르민 상단의 주인이 될 수 있는데?

-아르멘탈리 남작이 순순히 내어 주진 않을 겁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구분될 정도로 또렷하게 들렸다. 카를의 커프스 단추는 당시 가슴께에 달려 있었던 듯했다.

 

 

-그녀가 걱정되니?

-형님과 약혼하기로 했다지만, 어쨌든 아르민 상단에 큰 애착을 가진 사람입니다.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높은 계급의 결혼은 손실을 따지면서 얻을 수 있는 건 다 취하는 거란다. 아르민 상단은 지참금이라고 하면 이해할 거다.

 

 

몰랐던 사실이 한꺼번에 덮쳐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글로리아는 축축한 손바닥을 드레스에 슬쩍 닦았다.

 

약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진 않았으니 언제든 깨지리라 예상하긴 했다. 유지된다고 해도 다니엘의 냉소와 함께 상상되진 않았다.

 

 

'우리 상단을 지참금으로 내놓으라 할 거였다고?'

 

 

카를이 베일에 싸여 있던 2왕자라는 사실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너에게 말하는 이유가 궁금하지?

-좀 많이요. 굳이 저에게까지 말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네가 아르멘탈리 남작과 친해서야. (침묵 속에서 다니엘이 실소를 흘렸다.)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은 짓지 마라. 모를 수가 없으니까.

 

 

크렌슈타인 영식이 아르멘탈리 남작과 친하다는 것은 사교계에도 공공연히 퍼진 사실이었다. 다만 카를의 정체가 2왕자라면 의미가 아주 크게 달라지는 것이었다.

 

 

-너를 거쳐야만 아르멘탈리 남작에게 닿을 수 있다는 게 성가셔서 약혼이라는 수를 뒀던 건데, 남작은 여전히 너와 더 돈독하더라. 누가 보면 네가 남작과 약혼하는 줄 알겠어.

-형님이 그동안 남작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아무리 남작 입이 무겁다고 해도 관계가 진전되고 있다면 귀족사회에서 알아챘을 텐데, 아주 조용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내 이름으로 선물도 보냈잖니. 남작이 잘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내가 다 섭섭하단다. 선물을 받고 인사도 없어서 실망스럽기도 했고. 그래도 신사답게 보채지 않고 잘 견디고 있는데, 귀족사회가 조용하다면 누구 탓이겠어?

 

 

약혼 얘기가 처음 나왔던 생일날 받은 목걸이가 떠올랐다. 그것 외에는 뭔가를 받은 적이 없어 의아했다.

 

 

-리아 탓을 하지 마세요. 형님이 선물만 보내신다고 다가 아닙니다.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그 애를 언급하거나 초대한 일도 없으면서, 그 애가 알아서 떠벌리고 다니길 바라셨어요?

 

 

그녀가 초청받은 왕실 행사라고는 다니엘의 탄신연 정도였다. 첫 춤을 추긴 했으나 그 뒤 다니엘이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아 누구도 글로리아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라진 선물에 관해 사용인을 의심하고 싶지 않은 글로리아에게 카를이 해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누가 선물에 최면 마법을 걸어서 준답니까?

-최면 마법이라니. 말을 꾸며내는구나.

-그런 사특한 물건을 제 친구에게 전달할 수는 없거든요.

-네가 남작을 위한 선물을 빼돌렸다는 얘기구나.

-빼돌리다뇨? 어쨌든 당사자에게 가긴 했습니다?

 

 

심장이 너무 세차게 뛰어서 명치까지 울렸다. 글로리아는 카를이 준 선물을 차근차근 떠올렸다.

 

어쩐지 그전에는 잘 하지도 않던 선물이 늘었다 했다. 네 머리색과 어울린다는 둥, 자기와 비슷한 물건이 있으면 좋겠다는 둥 온갖 빌미로 건넨 장신구가 몇 개였던가.

 

심지어 지금도 글로리아는 카를이 준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그것들이 전부 다니엘이 선물한 거였다고? 무려 최면 마법이 걸린 채로?

 

영상 속 카를이 일어섰는지 다니엘의 얼굴이 아래로 내려갔다.

 

 

-아무튼 저는 형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요. 그럴 바에는 저와 직접 연결해 주시죠.

-아르민 상단을 나에게 넘기지 않을 텐데, 너만 좋은 일을 하는 거잖니. 안 하겠다면 이 이상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겠구나.

 

 

영상은 카를이 퇴장하고 문을 닫으면서 끝났다. 카를은 조심스럽게 글로리아를 살폈다.

 

글로리아의 떨리는 눈이 커프스 단추를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