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나 2. 상자에 담긴 것(3)
9화. 상자에 담긴 것(3)
빌의 집에서 바닷가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 느리지 않은 빌의 달리기 속도라면 금세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항구 어디에도 레이카의 흔적이 없었다.
빗줄기가 얼굴을 때렸다. 빌은 문득 레이카가 바닷속에 들어간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비 오는 날 물속에 들어가는 미친 짓을 할 사람은 없었다. 배를 띄우기도 험한 날씨였다.
그는 뭘 믿고 자신이 가는 게 빠르다고 했을까? 빌은 해변을 따라 걸었다. 섬을 한 바퀴 돌 기세였다.
체감상 두 시간은 돌아다닌 듯했다. 무작정 헤매다 집 방향으로 돌아가던 빌의 시야에 뭔가 검은 덩어리가 들어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웅크린 사람이었다.
엘리나에는 유전적으로 외형에 짙은 색은 잘 없었다. 뱃사람들의 피부만 좀 그을릴 뿐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레이카라는 것을 빌은 알아챘다.
"레이카?"
빌의 목소리를 들은 레이카가 뒤를 돌아보았다. 빌은 흠뻑 젖은 그에게 우산을 씌웠다. 쪼그려 앉은 레이카의 앞에 사람이 누워 있었다. 빌의 아버지 안드레였다. 6년 사이 많이 늙은 티가 났지만 빌은 알아볼 수 있었다.
"아버지?"
"해변에 밀려와 있었어요."
레이카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빌은 거센 파도소리를 들으며 문득 그게 말이 되나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당장 중요한 건 아버지를 살리는 일이었다.
안드레는 숨을 쉬지 않았다. 빌은 학교에서 배운 심폐소생술을 시도하기로 했다. 빌이 안드레의 가슴을 누르려는 찰나 레이카가 말했다.
"아까 해봤어요."
"해봤다고?"
"그래요."
"아니야. 한 번만 해보고 어떻게 알아."
"세 번은 했어요."
빌은 맥이 빠지기 시작했다. 거짓말. 아들이 돌아오는 날 죽어버리는 아버지가 어디 있어.
그는 축 늘어진 안드레를 힘겹게 들어 업었다. 그러는 동안 레이카가 휘청거리는 빌을 붙잡았다.
빌의 발걸음은 섬에 딱 하나 있는 작은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이라 하기도 민망한 규모였지만 섬 사람들은 주로 거기서 진료를 받았다. 섬 주민들의 편의를 만족시키고 급할 때 빨리 배를 타러 갈 수 있는 최적의 위치를 찾느라 반년이나 병원 부지를 정하지 못했다는 건 빌 세대의 아이들까지도 아는 유명한 일화였다.
그리고 그 병원은 의사 혼자 운영했다. 의사 역시 엘리나 출신 아르카 유학생이었다.
사람이 적다 보니 느즈막히 문을 열고 해가 질 무렵에 닫았다. 지리적 특성상 해가 길다고 해도 병원은 이미 문을 닫았을 시간이었다.
빌은 의사가 어디서 사는지도 몰랐다. 문을 두드려도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물에 젖은 안드레의 몸이 빌을 더 짓눌러왔다.
"이봐요!"
"일단 집에 가요."
"아버지가 안 깨어나시는데 어떡해 그럼!"
레이카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했지만 대답 없는 병원 문을 바라보았다.
"부수고 들어갈래요?"
"그건 안 되지."
"이 와중에도 시민의식이 있다니 대단한 사람이군요."
빌은 아버지를 업은 팔에 힘을 줬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가망 없는 거 나도 알아. 그래도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는 거잖아. 그냥 잠시만…… 부정하고 싶을 뿐이야."
빌이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누군가가 빗속에서 나타났다. 밖에서 희미하게 들린 말소리를 듣고 나온 섬의 유일한 의사였다.
"무슨 일이죠?"
로버트 부부와 스미스 여사가 엘리나항에 도달한 건 빌과 통화한 다음 날이었다. 비비안의 결혼 후 설치한 전화기가 아니었다면 빌의 황급한 글씨로 적힌 편지가 도달하기까지 2주는 걸렸을 터였다. 그 즈음이면 일은 이미 마무리한 뒤일 것이었다.
비비안의 눈에 들어온 건 위아래를 검정색으로 차려입은 빌이었다. 밤을 샌 빌의 눈 밑 그림자가 볼까지 드리웠다. 구색은 맞추고 있었던 아들을 본 셀레네가 눈물을 왈칵 쏟았다. 기력이 없는 장모와 목이 멘 아내 대신 윈스턴이 대신 질문했다.
"아버님은 어디 계셔?"
"저쪽에 계세요."
빌이 대충 팔로 방향을 가리켰지만 비비안은 어디인지 아는 눈치였다.
네 사람은 침묵 속에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엘리나 북부에 조성한 공동묘지였다. 척박한 환경이라 인적이 드물어 장례를 치르기 좋은 위치였다.
섬에서는 생전 어떤 일을 했는지에 따라 장례 방식도 달리 했다. 뱃사람은 배에 안치하고 불을 붙여 바다에 떠내려보냈다. 섬 안에서만 있던 사람의 장례는 육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형적인 어부였던 안드레는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모아서 산 조각배 안에 누워 있었다. 가족들을 다 뭍으로 보내고 혼자 살았던 그를 동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모여 있던 주민들은 빌의 가족이 도착하자 길을 터주었다. 다들 오랜만에 섬을 찾은 그들과 데면데면했다. 유일하게 그들과 같이 살았던 아이작이 나섰다.
"오셨어요?"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
비비안과 윈스턴이 차례로 아이작을 안았다. 셀레네는 배에 눕혀진 안드레에게 다가갔다.
"아들이 온다는데 집에서 얌전히 기다릴 것이지 왜 마중을 나가서는……."
"갓 잡은 신선한 생선으로 요리해주고 싶었겠죠."
메리가 옆에서 셀레네를 달랬다. 누군가가 횃불을 가지고 왔다. 안드레의 배 안에 윈스턴이 가져온 꽃이 놓였다. 몇몇은 섬에서 보기 힘든 꽃을 구경하느라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빌이 횃불을 받아 들었다. 그는 배를 바다에 띄우고 불을 붙였다. 횃불을 배에 던져넣었지만 불길이 얼른 세지진 않았다.
다들 묵념을 하며 안드레를 보냈다. 스미스 가족은 불꽃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간 건 배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도 한참 지난 뒤였다.
비비안은 오랜만에 들어간 부엌 찬장을 뒤적거렸다. 셀레네는 방에서 쉬고 있었다. 윈스턴과 빌은 간단한 요깃거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찬장에서 술을 찾아낸 비비안은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뚜껑을 열었다. 당황한 윈스턴이 그녀에게서 술을 가져갔다. 비비안은 임신 10주 차였다.
"당신은 안 돼. 이건 나랑 처남이 마실 거야."
"뭐? 너무해."
"지금 술 마시면 아이한테 안 좋아. 당신은 몸 풀고 1년 쯤 지나면 마시게 해줄게."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당신 둘째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야."
누나 부부의 대화를 듣던 빌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노력이 통한 것을 확인한 부부가 안도했다.
빌이 스튜를 접시에 담았다. 전날 밤 아버지를 기다리며 해 먹고 남은 것이었다. 접시 세 개가 탁자에 놓였다. 셀레네는 입맛이 없어 나오지 않았다. 조용히 식사하던 중에 비비안이 불쑥 말을 꺼냈다.
"내 이름 아버지가 지어주신 거야."
"그래?"
"너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계속 들려주신 얘기 기억나?"
비비안이 자기 이름의 기원을 처음 들은 건 다섯 살 무렵이었다.
안드레는 셀레네가 임신했을 적,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에 휩쓸린 적이 있었다. 방향감각을 잃고 수영할 곳도 찾지 못하는데 뭔가가 그를 붙잡았다.
처음에는 해초에 묶여 그대로 가라앉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니 그는 물 밖으로 나와 있었다. 안드레를 구한 건 해초와 같은 머리색인 인어였다. 안드레는 생명의 은인에게 이름을 물었고 인어는 '비비안'이라 답했다.
"내가 열세 살이 되고 이제 아빠 말은 안 믿는다고 했더니 더 이상 그 얘기를 안 하시더라고."
"당신이 열세 살일 때면 처남은 세 살 아니야? 기억 못 할 것 같은데."
"맞아. 나 처음 들어."
빌의 반응에 비비안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녀의 기억에는 그 일화를 듣는 동안 빌도 있었다. 그 동생이 그렇게나 작은 꼬마였다는 사실은 망각한 상태였다.
"내가 그 얘기 듣고 인어에 얼마나 환상을 가졌는지 몰라. 근데 아무리 물속에 들어가도 인어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라. 그래서 아빠가 거짓말을 하셨구나 생각했어."
"인어가 어디 있어."
"그래, 너도 안 믿을 줄 알았다."
비비안이 뾰로통해져서 스튜 속 당근을 씹었다. 세 사람은 침묵 속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들 모두 안드레와 추억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