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나 3. 해저왕국 아퀘이레(2)
16화. 해저왕국 아퀘이레(2)
조개껍데기를 다 채운 뒤에야 레이카의 이야기가 끝났다. 껍데기의 면적이 좁아 이야기를 다 담지 못할 때가 있어 아예 큰 걸로 가져온 것이었다.
아이리스는 기록한 걸 다시 읽어보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카가 들려주는 물 밖 이야기는 한 번 듣고 말기엔 아까워 조금씩 써둔 게 습관이 된 것이었다.
껍데기 무더기에 조심스럽게 방금 쓴 걸 올려둔 아이리스는 위쪽에 뚫린 구멍을 슥 봤다.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돌아가야겠네."
"벌써 어두워질 시간이야?"
"네 얘기가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나봐."
아지트에서 나온 둘은 인어들이 서둘러 헤엄쳐 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아퀘이레 인어들이 한 마음으로 움직일 때면 대체로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아이리스를 알아본 누군가가 급히 허리를 숙였다.
"공주마마, 어서 궁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무슨 일이지?"
"풍랑이 밀려와 긴급대피령이 내려졌습니다."
고개를 드니 수면 부근 물이 뒤집히듯 흐르고 있었다. 해가 질 시간도 아닌데 벌써 어둑어둑해진 이유가 있었다.
거처가 물 밖에 있는 레이카는 파도가 잠잠해질 때까지 나갈 수 없었다. 그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아이리스와 함께 궁궐로 피신했다. 궁으로 헤엄치면서 아이리스가 그에게 물었다.
"엘리나는 괜찮겠지?"
"거기는 비도 잘 안 내려. 바다에 나와 있는 거 아니면 괜찮아."
"그래도 혹시나 만약에 지금 낚시라도 하러 나가 있으면……."
"지금 누구 걱정을 하는 거야? 얼른 가자."
레이카의 미끄러운 지느러미가 아이리스의 팔을 잡을 듯 스쳤다. 부서진 나무의 잔해가 떠다녔다.
바다를 관장하는 아퀘이레의 왕은 공식 항로가 아닌 곳을 지나는 배를 가라앉혀왔다. 바다의 신에게 제를 지낸답시고 뭔가를 물에 뿌리면 더 큰 파도를 일으켰다.
그렇다고 아무 배나 다 부수는 건 아니었다. 아퀘이레의 지배자만이 느낄 수 있는 배의 분위기로 결정하는 것이었다.
실수로 흘러온 배는 물의 흐름과 바람을 조절해 제대로 된 길로 가게 했다. 망명하는 사람에게는 꿈에 나타나서 신탁을 내리기도 했다. 아이리스의 아버지이자 아퀘이레 왕인 르발라 리쿠스토는 불순한 의도로 바다를 침투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아퀘이레 인어들은 왕이 불게 한 것과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다. 왕족인 아이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번 풍랑은 밀수와 관계가 없는지 육지 물건이 가라앉진 않았다.
계속 뭔가 신경 쓰이는 듯 수면 쪽을 보던 아이리스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뭔가가 물이 흐르는 대로 힘없이 쓸려다니고 있었다. 방향이 정해져 있는 인어들의 수영과는 달랐다. 아이리스가 위쪽으로 가기 시작하자 레이카가 당황해 소리쳤다.
"공주님, 어디 가!"
"나 뭐 좀 보고 올게."
수면에 가까워질수록 어떤 생물도 보이지 않았다. 세찬 해류에 아이리스도 휘청거렸다. 그 이상한 것은 확실히 인어는 아닌 것 같았다. 그는 팔을 허우적거리며 방향을 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둘로 갈라진 하반신을 잠시 넋 놓고 바라보았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형태였다.
그가 온몸을 비틀며 입에서 공기방울을 내뱉었다. 잠시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가 하더니 곧바로 물속에 다시 빠졌다. 그의 하반신 끝에서 껍데기가 벗겨졌다. 겨우 뒤따라온 레이카가 그것이 떠내려가기 전에 붙잡았다.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치워가며 아이리스는 고통스러워 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로 그의 몸통을 껴안았다. 아이리스의 팔 안에 갇힌 그는 고개를 움직이려고 했으나 이내 축 늘어졌다.
아이리스가 그를 안은 채 물 밖으로 나갔다. 파도는 아까보단 위력이 약해져 있었다.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아이리스는 방향을 가늠했다. 먹구름이 낀 하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에 맞는 느낌이 이상해서 아이리스는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해류를 따라 떠다니던 그녀의 시야에 뾰족히 솟은 뭔가가 보였다. 마침 레이카도 그걸 발견한 듯했다.
"저기야! 저쪽으로 가!"
뭍으로 다가갈수록 빗줄기가 약해졌다. 레이카가 그의 하반신을 받치고 헤엄쳤다. 둘은 그렇게 이 수상한 생물을 해변에 눕힐 수 있었다.
아이리스는 숨을 돌리고 레이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레이카의 외모가 아이리스와 비슷하게 변해 있었다. 귀와 목덜미를 덮는 검은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착 달라붙었다.
"너 물 밖에서는 그런 모습이구나."
"본 적 없었나? 나 옷 좀 입고 올게."
레이카는 근처 동굴을 향해 달려갔다. 잠시 생각에 잠긴 아이리스는 물 밖에 나온 레이카와 물에 빠졌던 생물의 외형이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방금 본 광경을 떠올렸다.
레이카는 둘로 나뉜 하체를 사용해 이동했다. 그가 물 밖에서 아무 어려움 없이 움직이는 걸로 보아 누워 있는 이 사람도 그럴 것이었다. 아이리스는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저기요, 눈 좀 떠봐요. 괜찮아요? 내 말 들려요?"
옷을 입고 온 레이카가 맞은편에 가 쪼그려 앉았다. 그의 표정이 심각했다.
"빌이야."
"뭐라고?"
"이 사람이 내가 말한 사람이야."
레이카의 이야기 속 빌이 눈앞에 있었다. 아이리스는 왠지 그가 반가웠지만 빌은 의식을 잃은 채 눈을 뜨지 않았다.
레이카가 빌의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잠바를 젖혔다. 빌의 가슴 중앙에 양손을 포갠 레이카는 팔을 일자로 펴고 체중을 실어 누르기 시작했다. 레이카가 뭘 하는지도 모른 채 지켜보던 아이리스는 문득 다른 게 걱정되기 시작했다.
"레이카, 난 물속에서 보고 있을게."
"왜?"
"이 사람이 눈을 떴을 때 내가 있으면 좀 그럴 것 같아."
아이리스가 육지 인간을 처음 봤듯이 빌 역시 인어가 낯설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육지 인간들에게 발견됐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 어느 집 인어 얘기도 떠올랐다.
아이리스는 팔로 바닥을 짚으며 하체 지느러미를 질질 끌고 겨우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레이카가 몇 번이나 빌의 몸을 누르는 걸 보았다.
얼마가 지나자 빌이 물을 토해냈다. 아이리스는 눈만 내놓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한참 기침을 하던 빌이 눈을 떴다.
"레이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