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나 4. 물 밖과 물속의 경계(9)
28화. 물 밖과 물속의 경계(9)
아이리스는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육지 인간의 손은 원래 이렇게 뜨거운 것인가? 몸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이 느낌은 뭐지?
그 낯설고 기분 좋은 감촉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가슴 안에서 콩콩거리는 울림은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덕분에 밤을 꼴딱 샌 것이었다.
식사를 준비하는 빌의 눈에도 그림자가 져 있었다. 유일하게 숙면했던 레이카는 피곤해 보이는 빌에게 쉬라고 권했다.
"들어가서 좀 더 자."
"아니야. 나 나가 봐야 해."
아이리스가 등장하자 식탁에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빌은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손짓으로 자리를 지정해 줬다. 레이카는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눈치를 보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둘이 오늘 왜 이래?'
오늘따라 빌은 레이카에게만 말을 걸었다. 평소에는 아이리스에게도 고개로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해왔다.
"너희 동네 말은 원래 글씨가 그렇게 달라?"
"그렇지 뭐."
"근데 말은 어떻게 통하네. 신기하다."
"같은 나라니까 통하지."
레이카의 가슴 한 구석이 따끔했다. 그의 고향은 같은 국가도 아니며 방문조차 불가능한 위치에 있는데. 그는 돌아가기 전까지도 빌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말자고 다짐했다.
빌이 나가자마자 레이카는 아이리스에게 다가갔다.
"공주님, 빌이랑 무슨 일 있었어?"
[별일 없었어.]
"근데 왜 눈을 못 마주쳐?"
[모르겠어.]
아이리스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레이카가 본 그녀는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비밀이 생긴 공주님은 이런 얼굴이구나.'
바닥 무늬를 훑는 금색 눈동자, 입술을 안으로 말아서 꾹 다문 입. 레이카가 아이리스를 안 지도 15년이 넘었다. 그는 어쩐지 조금 섭섭함을 느꼈다.
"우리 사이에 비밀 같은 거 없었잖아."
아이리스는 금빛 눈동자를 또륵 굴렸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모습에 레이카는 입을 삐죽거렸다.
"뭐야, 공주님이 나한테 비밀이 있어?"
[너는 나한테 비밀 없어?]
"난 당연히 없지."
이번엔 아이리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레이카를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를 이런 상황에 처하게 만들고 되돌릴 방법도 모른다는 건가?
아무리 편한 사이라지만 작정하면 왕실모독죄로 고발할 만한 사항이었다. 아이리스가 아퀘이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다.
'그래서 육지로 내몰았나? 고발도 못 하게 하려고?'
오랜 친구조차 의심하는 자신의 모습에 아이리스는 문득 놀랐다. 하지만 의심하지 않기엔 레이카가 그녀의 목소리를 가져간 장본인이었다.
그녀는 가장 의지해야 할 존재가 가장 의심스러운 이 상황이 싫었다. 의심을 멈추려면 확신이 필요했으나 레이카는 꾸준히 부정해왔다.
마치 자신이 그랬다는 사실을 잊은 듯했다.
꼬리를 잇던 아이리스의 의구심은 근본적인 것으로 향했다.
'아레카족이 변신의 대가로 신체 일부의 기능이 훼손되던가?'
그녀가 아는 분야는 아니었다. 레이카는 대를 이을 수 없다고 했으니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게 당연했다.
'나중에 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