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멘 1. 어린 남작(4)
78화. 어린 남작(4)
글로리아는 흐물거리며 침대에 털썩 누웠다. 하녀가 포르르 쫓아와서는 그녀를 일으켰다.
"아가씨, 아니, 남작님, 많이 힘드셨어요?"
"괜찮아."
몸이 지치자 감정을 느낄 새가 없었다. 몇 시간 전에는 울었다가 사람들 틈에 둘러싸였다가 마차에서 겨우 눈을 붙였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동안 불편하게 잠을 청했더니 굉장히 피로했다.
"목욕물 데워놨어요."
"고마워."
글로리아는 하녀에게 몸을 맡긴 채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직속 하녀 안젤라는 오늘따라 입이 고요한 제 주인을 바라보았다.
평소 같으면 오늘 공부가 어땠고 영애들과의 모임에서 무슨 얘기가 나왔는지 쉼없이 들려주던 글로리아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어색했다.
하지만 지금은 특수한 경우였다. 안젤라는 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꾹 참고 있을 어린 소녀에게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기로 했다.
목욕을 마치고 머리를 다 말린 글로리아는 습관적으로 아버지의 침실로 향했다. 잠들기 전 인사를 드리곤 했던 것이 저절로 몸을 움직이게 했다.
가볍게 문을 두드린 글로리아는 뭔가 쎄한 느낌을 받았다.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버지."
글로리아는 대답이 없는 문을 열었다. 서늘한 공기가 그녀를 맞았다.
선대 아르멘탈리 남작, 글로리아의 아버지 게오르그는 없었다.
"아빠?"
당황하자 어릴 때 쓰던 호칭이 나왔다. 아버지가 안 계신다는 게 새삼 피부로 와닿았다.
저택을 순찰하던 경비병이 그녀를 발견하기 전까지 글로리아는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남작님, 안 주무십니까?"
"혹시 아버지 아직 집무실에 계신가?"
경비병은 흠칫 놀라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어린 소녀가 느낄 상실감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게오르그 선대 남작님께서는 돌아가셨지 않습니까."
"어?"
"어서 들어가 주무십시오. 몸 상하십니다."
"……그래, 그랬지."
경비병의 호위를 받으며 제 침실로 돌아온 글로리아는 천천히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방금 보고 온 게 진짜란 말인가? 누군가가 질 나쁜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
아까도 운 것 같은데 또 눈물이 났다. 글로리아는 소리가 샐까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다음 날, 아르멘탈리 남작가의 아침은 무겁게 내려앉은 채 시작되었다.
글로리아는 아침식사는 하는 둥 마는 둥 치워버린 뒤 다시 침실로 향했다. 사용인들만이 평소와 같이 자기 일을 할 뿐이었다.
멍하니 침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글로리아는 노크 소리에 반응했다.
"들어와."
"남작님, 클로이스 변호사가 왔습니다."
하녀가 아니라 집사장 르벤이 직접 부르러 왔다. 글로리아는 '남작님'이라는 호칭에 여전히 어색함을 느끼며 일어섰다.
"응접실로 모셔요."
"말씀 편히 하십시오."
"하지만 르벤은 어릴 때부터 봐왔잖아요."
"그런 분을 주인으로 모시게 돼서 이 늙은이는 기쁩니다."
"아직 60도 안 됐으면서 늙은이라뇨……."
"고향 친구들 중에는 남작님만 한 손주를 본 사람도 있답니다."
그건 그 사람이 유별난 거라고 글로리아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그럼 나도 얼른 준비해서 나갈게, 요. 안젤라, 들어와서 나 좀 도와줄래?"
클로이스 변호사는 아는 사람이지만, 작위를 받고 처음 맞이하는 손님이었다. 미숙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글로리아는 안젤라가 치장을 돕는 동안 심호흡을 한참이나 했다.
게오르그는 그를 어떻게 대했을지, 글로리아는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상상했다.
응접실로 내려간 글로리아는 딱딱하게 굳은 걸음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대부인과 언니들이 먼저 와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클로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또 뵙네요. 이제는 남작님이죠?"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식사는 하셨나요?"
"네, 저는 남작님이 더 걱정입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제가 돈만 있지 귀족은 아니잖습니까."
"다들 말 편하게 하라고 하네. 좋아, 클로이스. 유산 상속에 관한 일인가?"
만족스럽게 씩 웃은 클로이스가 가방을 열었다.
"게오르그 아셸만 아르멘탈리 선대 남작님의 유언을 공개하겠습니다."
변호인이 유언을 읽어내려갔다. 유언장 내용은 글로리아가 먼저 확인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메리 아르멘탈리에게는 아르민 상단을 제외한 재산 절반을 상속하고 상단 운영에 관한 권리를 부여한다. 실비아·바이올렛 아르멘탈리에게는 나머지 절반을 상속한다."
아르멘탈리가에서는 작위와 상단이 곧 재산이었다. 그를 제외한 재산은 기껏해야 품위유지비 정도일 터였다.
바이올렛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메리와 실비아의 표정도 그리 좋진 않았다. 글로리아는 묘하게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남작 대부인과 자매에게도 재산이 돌아가긴 하지만, 글로리아가 얻게 되는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변호사가 유언장 낭독을 마쳤다.
"이상이 게오르그 아셸만 아르멘탈리 선대 남작님의 유언입니다."
"말도 안 돼! 글로리아가 작위에 상단까지 다 갖는다고?"
"작성 당시 공증까지 마친 유언입니다. 왕족이어도 이를 뒤집을 순 없지요."
남작 대부인 메리 아르멘탈리는 분개한 바이올렛의 손을 잡았다. 온몸의 떨림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엉덩이를 한번 들썩인 바이올렛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작위야 그렇다 치고 어떻게 상단까지 얘한테 넘길 수가 있어?"
"그 상단 덕에 얻은 작위이니 떼어놓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지분만 있을 뿐 경영권은 나에게 있다는 얘기 아닌가?"
"아닙니다. 상단주로서의 권한에는 경영도 포함됩니다."
"경영권까지 나눠 갖는 게 말이 돼!"
남작가로 입적된 뒤 귀족처럼 보이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가. 바이올렛은 정식으로 사교계에 들어선 이후 모임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비웃음과 무시하는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열심히 정보를 캤다.
주워 듣는 것도 3년이면 어느 정도 현실을 알게 되는 법이다. 다른 귀족들이 그녀를 비웃으며 했던 말들이 맴돌았다.
'그래봐야 하녀의 딸이지.'
'불쌍하니 거두어준 은혜도 모르고 진짜 귀족인 양…….'
'그쪽이 그렇게 애쓴다고 뭐 하나 떨어질 것 같나? 아무리 인망 높은 아르멘탈리 남작이라도 작위는 친딸과 결혼하는 남자에게 물려줄 테지.'
이번에 유언을 들으니 확실해졌다. 그들의 말이 사실임을.
선대 아르멘탈리 남작도 혈통주의 귀족에 불과하다는 것을.
글로리아는 침착하게 있으려 노력했다. 이글이글 타는 바이올렛의 노골적인 눈빛을 피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