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멘 1. 어린 남작(5)
79화. 어린 남작(6)
바이올렛은 내내 끼니도 거른 채 불안한 듯 방 안을 서성거렸다. 잘 준비를 마치고 올라온 실비아가 동생의 방을 찾았다. 문 앞에는 하녀 한 명이 서 있었다.
"바이올렛은 안에 있는가?"
"네, 오셨다고 일러 드릴까요?"
"그래 주렴."
"아가씨, 실비아 아가씨께서 오셨어요."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실비아가 직접 문을 두드렸다.
"바이올렛, 들어가도 될까?"
"왜?"
"배고프지 않나 싶어서."
"식사하라고 부르는 거면 됐어. 입맛 없으니까."
퉁명스러운 반응에 문 너머에서 실비아의 한숨소리가 났다. 바이올렛이 식사를 거부한 건 2년 전 데뷔탕트를 앞두고 살을 뺀답시고 단식을 했던 기간 이후 처음이었다.
결국 데뷔탕트 파티에서 인사보다 취식에 집중해 예의 없다는 말까지 들었다.
바이올렛은 그동안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밥을 먹지 않는다는 발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귀족 생활이 애를 잡을 것 같다고 판단한 실비아는 게오르그에게 파양을 부탁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속이 답답한 건 바이올렛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친언니라면 이 정도 고민은 같이 들어주지 않겠나 싶었다.
"들어와."
하녀가 문을 열자 실비아는 고고한 발걸음으로 들어섰다. 귀족 태가 나는 언니를 보니 울화통이 터졌다.
남작가로 입적된 이후 곧잘 예법을 익히더니 완연하게 자세가 잡힌 모습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라고 생각할 듯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금방 따라오지 못했던 바이올렛과는 딴판이었다.
실비아는 티 테이블에 앉았다.
"그렇게 서성거리지 말고 너도 앉아."
예민했던 바이올렛의 마음이 한 층 가라앉았다. 오랜만에 들은 고향의 언어 때문이었다.
메리는 게오르그와 재혼하면서 딸들에게 카르멘어만 쓰게 했다. 심지어 세 모녀만 있을 때도 아르카어를 못 쓰게 하면서까지 카르멘어에 적응하게 했다.
그럼에도 바이올렛의 카르멘어에는 엘리나 방언이 섞여 있었다. 아르카에서도 한참 북부인 엘리나는 섬이라는 특성 때문에 방언이 다른 지역에 비해 유별났다. 사투리가 심한 사람은 육지 사람과 대화가 통하지 않을 정도였다.
여전히 고향의 말씨가 편한 바이올렛에게 아르카어 공부는 예법보다도 스트레스였다. 그렇게 능숙하지 않은 언어를 써서 항의해야 한다는 것도 그녀의 예민함을 키웠다. 그녀는 간만에 입과 뇌가 편한 말을 쓸 수 있어 마음을 조금 열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너 네 상속분이 성에 안 차서 이러는 거니?"
"당연하지!"
실비아의 상속분은 바이올렛과 비슷했다.
정산해 보니 평민일 적 씀씀이를 유지하는 실비아에게는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모임에 잘 나가지 않으니 옷을 많이 살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초대장만 오면 바로 준비에 나서는 바이올렛에게는 터무니없는 액수였다. 이번에 받은 돈으로는 결혼 전까지 품위유지에나 쓰게 되겠지!
딱 외적인 관리만 될 뿐, 그녀가 모임을 주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겨우 그걸로는 사회생활도 못 해."
"있는 걸로 잘 다니면 되잖니."
"귀족은 외적인 것에서 1차적으로 평가받는 거 몰라? 저번에 입은 걸 또 입고 나오면 체면이 뭐가 돼?"
"진짜 귀족도 아니면서 쓸데없이 사치를 부린다고 흉이나 듣는단다."
"욕은 지금도 충분히 듣고 있어."
귀족 교육을 받더니 언니도 꽉 막혔다. 엘리나 사투리는 레이스탄 제국 시절의 어휘가 남아 있어 육지 방언보다 부드럽게 들렸다. 그러나 정반대 방향인 카르멘의 언어는 투박했다.
바이올렛은 언니의 느끼한 귀족 말투가 거슬렸다. 고향 사투리에 묻은 딱딱한 말씨를 더 듣기 싫었다.
"모임만 나가면 다들 얼마나 괄시하는지 모르지? '아르멘탈리가에 초대장을 보내면 꼭 바이올렛 영애가 오네? 난 글로리아 영애를 부른 건데…… 아, 글로리아 영애는 아직 데뷔를 치르지 않았으니 이런 나이 많은 영애들과 어울리기는 힘들겠구나. 언니가 있다면서? 나도 한번 만나고 싶은데, 같이 올 순 없나? 혹시 어디 내보이기 창피한 수준인가?' 동생이 이딴 소리 듣는 거 알면 언니도 집에만 못 있어."
지위가 높지 않은 귀족 가문 사이에서 남작가로서 위세를 떨치는 아르멘탈리가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아르멘탈리가의 위신이 있기에 초대한 것이었다. 그들로서는 글로리아가 나오는 게 자기들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한 바이올렛에게 눈치를 주기 바빴다.
바이올렛은 서툰 실력을 숨기느라 말을 많이 하진 않지만 자기 욕하는 건 기가 막히게 외우고 훗날 써먹었다. 화가 나면 서툴던 카르멘어가 술술 나왔다. 실비아는 그 긴 문장을 외우고 있는 동생이 안타까웠다.
"내 얘기까지 나오는 걸 보니, 나도 한 번은 나가야겠구나."
"그 인간들 콧대를 한 번은 눌러줘야 한다고. 자기들도 쥐꼬리만 한 영지나 부쳐 먹는 주제에 누가 누굴 무시해?"
"바쁘지 않다면 글로리아도 같이 가는 게 좋아. 이제 남작이잖니."
언니의 말에 바이올렛은 잊고 있던 화가 다시 올라왔다. 동생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지는 것을 본 실비아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고 진심으로 믿는 것 같았다. 그들이 처한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 수준이 아님에도.
바이올렛이 결심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놀란 실비아가 같이 일어섰다.
"어디 가?"
"글로리아한테. 우리 몫을 더 달라고 할 거야."
"너는 자존심도 없어?"
"자존심도 없는 건 언니야. 우리가 친자식이 아니라고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줄 알아?"
언니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테지만, 바이올렛은 아니었다.
다음 날부터 바쁜 일정이 기다리는 글로리아는 잠이 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글로리아의 앞에는 일이 산더미였다.
"공부 좀 열심히 할걸……."
자신이 이렇게나 일찍 후계를 이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차라리 친척에게 맡기는 게 나았을 텐데.
그러나 방계 중 믿을 만한 가문이 몇 없었다. 가주들이 대체로 아버지 또래인지라 아르민 상단이나 남은 가족까지 챙길 여력이 없을 터였다.
세인트에 있는 사촌들은 아직 어려서 그녀가 거둬야 할 판이었다. 그들에게 왕가라는 뒷배가 있는 게 다행이었다.
이불 속에서 한참 뒤척이는데 하녀가 문을 두드렸다. 그녀도 잠자리에 든 줄 알았던 글로리아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무슨 일이야?"
"남작님, 바이올렛 아가씨께서 뵙자고 하세요."
"알았어."
이불 밖으로 나온 글로리아가 급히 숄을 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