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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3. 수상한 사촌(7)

슬기옥 2023. 10. 2. 19:05
98화. 수상한 사촌(7)



 

오늘은 다른 모임이 없어 일찌감치 들어가 쉬기로 했다. 글로리아야 평소에도 직원들 다 보내고 자신은 저녁 식사 전까지 있었으니 알 바 아니고.

 

아르민 상단의 일에 적응하니 은근히 할 만했다. 그전에 글로리아에게 일자리를 청탁할 때만 해도 직접 움직이는 건 싫었는데, 바이올렛은 의외로 홍보가 적성에 맞았다.

 

저택으로 퇴근한 세 모녀는 정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이올렛은 그 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사피네 영애?"

 

 

트리엘라 사피네는 바이올렛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이에요, 바이올렛 영애."

"밖에서 뵙는 건 처음이네요."

"아는 사람이니?"

"그럼요. 사피네 백작가 영애예요. 들어가서 얘기 나누시죠."

 

 

메리가 살짝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글로리아의 친구들은 자신이 언제 오는지 회사로 미리 연락이 왔다. 매일 출석도장을 찍다시피 오는 카를은 그 연락이 조금 무의미하긴 해도 어쨌든 고지를 했다.

 

그래도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바이올렛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백작가 영애라니. 뻔질나게 모임을 드나든 노력이 헛수고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 게 아닌가.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트리엘라는 바이올렛과 둘만 대화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메리는 애초에 같이 있을 생각도 없었지만, 실비아는 사피네 영애를 수상쩍게 쳐다봤다.

 

안젤라가 응접실에 다과를 챙겨주고 문을 닫았다. 바이올렛은 짐짓 언니의 흉내를 내며 허리를 곧게 세웠다.

 

 

"사피네 영애가 저를 보자고 하실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미리 연통을 넣었으면 좋았을 텐데 죄송해요. 영애가 갑자기 생각났거든요."

"제가요? 무슨 일로요?"

 

 

바이올렛의 기대의 찬 눈빛은 트리엘라를 살짝 부담스럽게 했다. 트리엘라는 바이올렛이 글로리아와는 좀 다른 사람이길 바랐다. 모임에서 몇 번 본 바로는 아주 상극인 것처럼 보이긴 했다.

 

 

"혹시 아르민 상단에 남는 자리가 있을까요?"

"글쎄요. 거긴 제 소관이 아니어서 모르겠어요. 그건 왜요?"

"약혼자에게 몰래 선물을 하고 싶은데, 지금 제 상황에서는 힘들거든요."

"돈이 필요하신 거예요? 그건 은행에 가시는 게 더 빠를 텐데요."

 

 

귀족성과 거리가 먼 말투는 여전히 거슬렸다. 몇 번이나 말투를 문제 삼았는데 고치질 않다니. 어느 지역 출신인지 듣도 보도 못한 억양이 섞여 더 듣기 싫었다.

 

 

'이래서 평민 출신은…….'

 

 

예법을 어느 정도 흉내는 내고 있지만, 몸에 배지 않아 어설프기 짝이 없다. 이런 사람에게 굽히고 들어가야 한다니 트리엘라는 자존심이 상했다. 차라리 글로리아에게 직접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니, 글로리아에게 말하는 것도 곤란하다. 그녀가 저택에서 안젤로에게 모욕을 준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안젤로가 물을 맞은 게 이 응접실 앞이지 않나.

 

 

"돈이 문제가 아니랍니다."

"그렇다면 아르민 상단에 올 이유가 뭐죠? 혹시 저희 물건을 찾으시는 거예요?"

"네, 아르민 상단에만 있는 물건이에요."

 

 

바이올렛은 그 물건이 무엇인지 열심히 추리했다. 약혼자에게 선물하고 싶지만 밖에서는 구입이 여의치 않아 아르민 상단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는 어떤 것.

 

 

"입사 선물에 들어있는 자체 제작 만년필 말씀이세요?"

 

 

허를 찔린 트리엘라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가 얼른 긍정했다. 기껏해야 아르민에서 독점으로 유통권을 쥔 상품을 말할 줄 알았건만. 운영은 하나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네, 맞아요."

"아, 그 만년필은 입사자의 이름을 각인해서 남에게 선물하기 좀 그래요."

"약혼자의 이름이 새겨진 만년필이라면 더 소중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회사 밖으로 못 가져가요. 자기 아니면 못 쓰기도 하고요."

 

 

아르민 상단의 만년필은 장부 조작을 막기 위해 고안한 물건이었다. 특수 잉크를 사용해 상단 내부에서 작성한 기록만이 진짜라는 신뢰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주인이 아닌 사람이 쓰면 잉크가 나오지 않으며, 외부로 반출하면 건물에 친 결계에 걸려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상단 건물 밖으로 가지고 나갔던 만년필이 사라져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사무실 책상에 얌전히 놓인 걸 목격한 바이올렛에게 아주 깊이 각인된 사항이었다.

 

어차피 트리엘라에게 필요한 건 만년필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아쉬운 척 눈꼬리를 내렸다.

 

 

"이런, 그렇게나 보안을 중요시하는 물건인 줄 몰랐어요."

"약혼자 선물은 다른 걸로 알아보셔야겠어요. 상단에서 취급하는 물건이라면 얼마든지 소개해 드릴게요."

"미안해요. 괜히 영애의 시간만 뺏었네요."

"아니에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녁 식사를 하고 가셔도……."

"그렇게 오래 있는 것도 예의는 아니죠. 저는 이만 가볼게요."

 

 

기실 트리엘라가 머무른 시간은 1시간을 조금 넘겼을 뿐이었다. 바이올렛은 어쩔 수 없이 손님을 보내야 했다.

 

 

"손님 가시니 문 열어 드려."

 

 

아무도 없어야 할 문 앞에 빨간 머리 소녀가 버티고 서 있었다.

 

 

"글로리아, 손님 가시는데 길을 막으면 어떡해?"

"사피네 영애가 저희 저택에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