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오래오래/레이스타인

카르멘 5. 남작, 그리고 리아(1)

슬기옥 2024. 7. 13. 17:29
109화. 남작, 그리고 리아(1)



 

모의장사의 최종 결과는 지난 시험의 성적과 합산돼서 자택으로 발송되었다.

 

아르멘탈리 남작가의 집사 르벤은 밀라발트에서 온 우편물을 보자마자 방학을 만끽하는 아서의 방으로 향했다.

 

 

"도련님, 밀라발트에서 우편물이 왔습니다."

"학교에서요?"

"이맘때에 올 만한 것은 성적표가 가능성이 있죠."

"그렇군요. 고마워요."

 

 

세인트에서는 방학식 날 성적표를 받았기에 이런 방식은 낯설었다.

 

아서는 르벤이 나간 뒤 봉투를 열었다. 성적 표기 방식은 두 나라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입가를 살짝 올리고 종이를 다시 넣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아서가 서두를 열었다.

 

 

"나 성적표 나왔어."

"그래? 잘 나왔어?"

 

 

그가 내색하지 않아서 공부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실 몇 번 물어보긴 했으나, 그때마다 대답이 재미없었다.

 

 

"나는 그래도 외국인인데 여기 사람만큼 잘하긴 힘들지."

 

 

왜 그렇게 자신없어 해서는 물어본 사람이 민망할 지경이었다.

 

막상 성적표를 확인한 글로리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런 점수는 그녀의 재학 시절에도 받아본 적이 잘 없었다.

 

 

"너 A가 아닌 게 있긴…… 하구나?"

"마법은 아직 서투르니까."

 

 

마력을 성장해서야 발현한 외국인 혼혈이라는 점에서 마법 과목은 다른 학생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긴 했다.

 

그러나 다른 과목은 그에게만 시험지를 쉬운 걸로 준 게 아닌가 잠깐 의심할 정도로 놀라웠다.

 

말을 잘하는 건 물론이고, 저택 근처쯤은 통역 없이도 잘 다니면서 겸손을 떨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들을 고생시킨 모의장사 역시 우수한 성적이었다. 글로리아는 자신이 발품을 판 게 헛되지 않음을 알게 되자 성적표가 자신의 것인 양 가슴에 품었다. 

 

 

"여기서 잘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성적까지?"

"네 덕분이야."

"고생 많았다."

 

 

남작 대부인이 짤막하게 치하했다. 실비아와 바이올렛도 뒤이어 한마디씩 덧붙였다.

 

 

"잘했네."

"수고했어."

 

 

아직 아서와 친밀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보인 나름의 호의였다.

 

글로리아는 간만에 부드럽게 풀렸지만 여전히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고자 화제를 돌렸다.

 

 

"참, 그러고 보니 2왕자님이 편지를 보냈더라고요?"

 

 

글로리아의 빈손에서 파란 실링으로 봉인된 금색 봉투가 나타났다. 1왕자 다니엘에게서 편지를 받은 적이 있어 금색 봉투는 왕실에서만 쓴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신분에 따라 실링 색을 다르게 쓴다는 건 이 봉투를 보고 알았다. 왕실에서 편지를 받을 일이 잘 없다 보니 그녀가 본 것은 공식 서한에 붙은 금색뿐이었다.

 

글로리아는 르벤이 가져다 준 우편물 속에서 그것을 쉽게 발견했다. 너무 낯설어서 눈에 띄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없던 일이기도 하고, 뭔가 심상치 않을 것 같아서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읽으려고 해요."

"2왕자님과 접촉한 적은 있니?"

"전혀요. 얼굴도 본 적 없어요."

 

 

신세를 지길 했나, 뭘 어쩌길 했나. 공식 석상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자신에게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인가?

 

봉인을 제거하는 글로리아의 손이 살짝 떨렸다. 매끈한 종이에 정갈한 글씨체로 문장이 쓰여 있었다.

 

 

[글로리아 리엘 아르멘탈리 남작에게.

탄신일을 맞이해 작은 연회를 열고자 합니다. 남작이 기꺼이 참석해 준다면 고맙겠습니다.

R. 397년 1월 27일 오후 4시까지 사파이어궁으로 오면 시종이 안내해 줄 겁니다.

그때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선물은 준비하지 않아도 됩니다. 남작의 참석만으로도 큰 선물이 될 거예요.

에스카르고 탈리히 데 아힐]

 

 

갑자기 편지를 보내서 미안하다거나 하는 일은 어떻냐는 식의 통상적인 인사도 없었다.

 

비트게너 공작가에서 받은 초대장에도 의미 없는 인사가 서너 줄은 들어간 뒤에야 본론이 나왔다. 글로리아도 몇 번 편지를 써봤지만, 이렇게 간결한 건 처음이었다.

 

글로리아의 음성이 끝나자 긴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편지를 다시 눈으로 읽으며 혼잣말을 했다.

 

 

"1월 27일이면 카를 생일보다는 늦네? 바쁘겠다."

"크렌슈타인 공자에게 집중하는 게 낫겠구나."

"그래. 본인도 선물 필요없다잖아."

"그, 왕실에서 정식으로 초대장이 오긴 했어요."

 

 

2왕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 보니 탄신연도 거의 처음 열리는 것이었다. 어디 방계 가문에서 요양 중이라고 했는데 이제 이런 행사도 열 정도로 괜찮아진 듯했다.

 

아무리 막연해도 2왕자 개인과 왕실 이름으로 오는 건 무게감이 달랐다. 평소 귀족과 거리가 멀어왔던 세 모녀는 같은 내용을 왜 굳이 두 번이나 보내냐며 의문을 표했다.

 

 

"가문 대 가문으로 공식 초청을 하는 게 보통이지만, 친분이 있으면 개인으로 보내기도 해요."

"너 2왕자 알지도 못한다며? 따로 보낼 이유가 없는데?"

"저도 그게 궁금하네요."

 

 

사파이어색 실링은 다섯 식구의 시선이 거둬진 뒤에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