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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오래오래/외전 미리보기

레이스탄의 마지막 밤

by 슬기옥 2017. 8. 24.

레이스탄 제국이 멸망했다. 세인트 남부 브랜든에도 그 소식이 들려왔다.

 

바깥 상황을 살피고 온 장남 펠렉은 거실에 모여 불안에 떠는 가족들에게 다가갔다.

 

 

"레이스탄 제국은 망했고 우리는 우리대로 새로 나라를 세울 건가봐요."

"다른 곳도 그런다니?"

"그러겠죠. 영토 분쟁이 일어나면 징집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알레니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펠렉은 그녀의 옆에 가 앉았다.

 

 

"걱정 마세요. 별일 없을 거예요."

"그래도 나라 하나가 세워지네 마네 하는 일이잖니. 막 제국이 몰락했다고 하니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귀족들끼리 알아서 하겠죠. 저희는 그저 먹고살게만 해주면 감사할 테니까."

 

 

셋째 며느리인 리버는 자기 아이를 무릎에 앉힌 채 말했다. 가족 전부가 평민 출신이기에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차남 티모시가 한술 더 떴다.

 

 

"화이트 공작이랑 샌더슨 공작이 눈치를 본다는 얘기도 있어요."

 

 

그들에게 귀족이란 공작 정도는 되어야 겨우 귀에 들어왔다. 가족들은 평소처럼 일상을 보내면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해산했다.

 

아들네 식구들을 전부 보낸 뒤, 노부부만 남았다. 알레니아가 찻잔을 정리하는 동안 토마스는 창고로 향했다. 그는 구석에서 오래된 상자 하나를 끄집어냈다.

 

뚜껑을 여니 50년이 넘도록 간직한 물건들이 나왔다. 선물 받은 책, 사냥대회 날 구색 맞추는 용도로 손목에 맸던 손수건, 펜으로 낙서하듯이 소년을 그린 종이 몇 장, 색이 바랜 여자의 초상화.

 

구불거리는 긴 갈색 머리카락과 에메랄드 빛 눈동자. 장미가 잘 어울리는 사람. 미소가 아름다운 사람.

 

일흔 살이 되었지만 초상화 속 여자에 대한 기억은 또렷했다. 승마를 가르치면서 가까워진 또래의 소녀였다.

 

그녀를 마음에 품었지만 이뤄지지 못할 사랑이었다. 소녀가 일찍 죽었다는 것도 있지만, 레이스탄 제국의 황녀를 감히 넘볼 위치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결혼 후 처음으로 꺼내 보는 초상화였다. 딱히 그녀를 잊고 산 건 아니었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충실해야 했기에 기억의 저편에 묻었을 뿐.

 

 

"황녀님, 레이스탄 제국의 역사가 끝났다는군요."

 

 

듣는 사람은 없지만 토마스는 혼잣말을 이어갔다.

 

 

"황녀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전 제 일생을 써나갔습니다. 아내가 생기고, 자식이 생기고도 전하를 보내지 못했어요. 이제는 제국과 함께 보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 관에 같이 묻어 달라고 하려 했는데. 레니가 이유를 알면 당장 쥐어 뜯겨도 할 말이 없군요."

 

 

그는 결혼 전날 밤에도 황녀의 초상화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면 로즈가 정말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전하, 저 내일이면 결혼합니다. 알레니아라고 아주 멋진 사람이에요. 축복해 주세요. ……전하를 좋아했던 감정은 잊지 않을게요. 시작하기도 전에 끝난 지난날의 첫사랑 정도로 남겠죠. 그래도 전하께서 주신 것들은 무덤까지 가져갈게요.'

 

 

그때 알레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토미, 어디 있어요?"

 

 

행복하게 오래오래 아르카편 외전-알파력 2027년/레이스탄력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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