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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오래오래/레이스타인

세인트 4. 아름다운 사람(5)

by 슬기옥 2022. 1. 16.
62화. 아름다운 사람(5)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켈리는 이 대열에서 벗어나 좀 쉬고 싶어졌다.

 

그때, 누군가가 켈리의 손을 잡아챘다.

 

 

"어머, 블랙 자작! 여기서 보네요?"

"누구지?"

"무례를 용서하세요, 저하."

 

 

앨리스가 작게 덧붙였다. 그녀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켈리는 주위 눈치를 본 뒤 낮게 속삭였다.

 

 

"영애도 이런 축제에 오는지 몰랐군."

"저도 로레인가가 그렇게 되고 처음이에요."

 

 

켈리는 헛기침을 했다. 형제의 상황을 상기하면 계속 몸 안 어딘가가 따끔거렸다.

 

이 감각을 애써 외면하려면 화제를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요새 사교계 분위기는 어떻지?"

"챌링턴 백작의 콧대가 낮아진 걸 제외하면 달리 도는 소문은 없어요."

"루이넬 영애가 순순히 물러나던가?"

"그럴 리가요. 사람도 많은 자리에서 공주님의 상황을 다 밝혀버리는 무례를 저질렀지 뭔가요."

 

 

켈리는 그녀의 목소리와 말투로 그 말이 들리는 듯했다. '하! 앨리스 영애, 공주님의 명령을 사칭하면 중죄라는 걸 모르시나요? 1왕녀 저하가 구스타브 변두리 몰락 가문에 가 계신다는 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알아요!'

 

구스타브 변두리라는 건 로레인 선대 백작, 그러니까 요제프가 막 체포되었을 때 루이넬이 쓴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럴까 봐 앨리스에게 그녀의 징표를 주었으니 무난하게 넘어갔을 터였다. 그건 누구도 복제할 수 없었다. 함부로 남발했다간 목숨까지도 위험할 수 있으니.

 

 

"저하께서……."

"영애, 여기가 아무리 서민가여도 보는 눈이 많아. 이미 자네의 존재만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고."

 

 

영지민 대부분은 로레인가의 영지를 자주 찾았던 앨리스를 알고 있었다. 앨리스도 사람들의 시선을 살폈다.

 

 

"아까도 나를 블랙 자작이라고 잘만 부르던데."

"그 일은 잊어주세요."

"오늘만큼은 그렇게 불러주게. 그 편이 나을 것 같아."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자작."

 

 

두 소녀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앨리스는 들고 있던 부채를 완전히 하체로 내렸다.

 

 

"마지막 춤은 누구와 출지 정하셨어요?"

"자네도 같은 걸 묻는군."

"그게 성 구스타브 안식제의 백미거든요."

 

 

켈리는 조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손님들 앞에서 그의 마지막 상대는 켈리라고 선언하던 모습이 선했다.

 

그녀가 대답하지 못하자 앨리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까 제이드와 추시는 걸 봤는데, 제이드에게 마음이 있으신 게 아니라면 조지도 괜찮아요."

"뭐, 뭐라고?"

 

 

누가 사촌 아니랄까 봐 앨리스도 같은 소리를 했다. 축제의 마지막 춤에 관한 설화는 성 구스타브 주민들만 아는 게 아닌 듯했다.

 

마지막을 알리는 듯 음악이 느려졌다. 우두커니 서 있는 그들에게 한 청년이 다가왔다.

 

 

"마지막 춤은 그쪽이랑 춰도 될까?"

"생각이 없네만."

"나도 별로야."

 

 

그들의 단호한 거절에도 청년은 굴하지 않았다.

 

 

"그 전설이 걸리는 거라면 나랑 추고 다른 사람이랑 춰도 되잖아?"

"그럼 자네에게만 마지막이 되는 건가?"

 

 

앨리스가 부채로 얼굴 전체를 가렸다. 켈리는 그녀가 그렇게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건 처음 봤다.

 

다행히 구세주가 금방 나타났다.

 

 

"어허, 마지막 춤은 나와 출 거야. 그치?"

 

 

어느 새 조지가 그들 사이에 끼어 들었다. 청년은 그를 노려보고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앨리스 너는 애먼 사람 괴롭히지 말고 집에 가."

"나도 좀 즐기자."

"또 나랑 마지막 춤을 추려고 온 거 아니지?"

"내가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야."

 

 

앨리스는 눈웃음을 지으며 멀어져갔다.

 

켈리는 조지가 다가오자 마음의 평안을 되찾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둘은 서로 몸을 포개고 리듬을 탔다. 켈리는 어쩐지 깍지를 낀 조지의 손이 편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조지를 바라보았다. 그도 켈리를 보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속이 아파온 켈리는 끝나가는 음악에 맞춰 춤을 마무리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집으로 돌아갔다. 옷에서 빵과 양념된 고기 냄새가 났다.

 

켈리는 자신이 아직 조지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쓱해져서 손을 빼려 하자 조지가 힘을 주었다. 그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이렇게 춤 추기도 오랜만이네."

"예전에도 누군가와 춤을 췄나?"

"내 마지막 춤 상대는 항상 앨리스였어. 근데 앨리스가 항상 마지막을 차지하는 건 못 보겠다고 여자애들이 아주……."

"아, 인기가 많았다고."

 

 

그녀에게 오기 전에도 몇 번이나 춤을 추었을 것이다. 켈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조지는 멀찍이 보이는 노점상 불빛을 보았다. 그리고는 켈리의 손에 깍지를 꼈다.

 

 

"우리 집에 그런 일이 있기 전에는 앨리스와 혼약이 있었어. 그게 당연한 줄로만 알고 살았지. 근데 이제는 결혼은커녕 연애도 힘들어."

 

 

켈리의 눈길이 맞잡은 손에 닿았다. 그녀는 왠지 손을 빼고 싶지 않았다.

 

 

"누가 몰락한 집안과 사돈을 맺고 싶겠어? 근데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나와 있으면 행복할 수 없을 텐데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하면 이기적인 거겠지?"

 

 

켈리는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말이 얼른 이해되지 않았다. 축제의 전설대로 그녀에게 마지막 춤을 바치지 않았나?

 

 

"어떤 사람이지?"

"이름처럼 아름다운 검은 머리카락을 지녔어."

"그리고?"

"사과를 싫어해."

 

 

켈리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달빛만 겨우 비추는 어둠 속에서 조지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