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버려진 왕자의 거취
왕자궁에는 늘 고요함이 감돌았다. 어릴 때부터 제임스가 워낙 얌전한 아이여서였다. 왕후가 지하감옥에 갇히면서는 더 조용해졌다.
제임스는 책을 뒤적거리다가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내며 하루를 보냈다. 식사 때마다 그를 찾는 사람 아니면 대화할 상대도 없었다. 공식석상에 나서지 않은 지도 몇 달이 지났고, 그는 곧 열네 살이 될 터였다.
창밖을 보는 것만으로 시간의 흐름을 파악하던 제임스는 한편으로는 자유로웠다.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는 샌더슨 공작도 없고, 가는 곳마다 따라와서 귀찮게 하던 시종 트레비도 없다. 온전히 그 혼자였다.
그래도 이렇게나 방문자가 없는 건 너무하지 않나? 어머니를 본 지도 오래되었다. 선대 왕후를 시해했으니 그만한 벌을 받는 건 당연하다지만, 아들의 면회도 금지라니.
참, 청소와 세탁을 위해 들어오는 사람이 있긴 했다. 그래도 그들과 뭔가 짤막한 대화를 하는 건 아니었다. 제임스는 그들의 이름도 몰랐다.
어제는 식사 시간을 알리는 하인의 목소리만 듣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무미건조한 하루하루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런 허전한 왕자궁에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다른 말이 들렸다.
"전하, 켈리 전하와 아르카의 윌리엄 왕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침대에 누워서 무의미하게 눈을 감고 있던 제임스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드디어 궁중 하인 말고 다른 사람을 보는구나 싶었다. 그는 반가운 마음에 맨발로 뛰어 문을 열었다.
"누, 누가 오셨다고?"
"왕자님의 누이이신 켈리 공주 전하와 아르카의 윌리엄 왕자 전하께서 지금 당도하셨습니다."
"잠깐만, 잠깐 기다려줘."
왕자궁 밖으로 나갈 일이 없다 보니 늘 잠옷 차림이었다. 처음 며칠은 그래도 낮에는 정복 차림을 했지만 곧 의미없는 짓이라 생각되어 한 잠옷만 며칠을 내리 입었다.
얼굴에 물만 찍어 바르는 수준으로 대강 씻고 간만에 다른 옷을 입었다. 아무리 감정이 좋지 않다지만 어쨌든 누이를 대하는 자리가 아닌가. 혼자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몸을 단장한 제임스는 켈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응접실로 걸음을 빨리했다.
"제임스, 오랜만이구나."
"왕자님을 뵙습니다."
두 사람은 들어오는 제임스에게 눈을 맞췄다. 켈리는 원래도 제임스보다 서열이 높았지만, 손님인 윌리엄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제임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주님과, 윌리엄 왕자님을 뵙습니다."
"그래, 건강해 보이는구나. 앉으렴."
"긴 머리도 잘 어울리시네요."
반년 넘게 다듬지 못한 머리는 가슴에 닿을 듯했다. 제임스는 괜히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다듬고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 손님이 올 거라는 예상을 못 해 탁자에는 차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제임스가 유폐 이후 주전부리를 일체 찾지 않아 남은 걸 하인들이 야금야금 다 먹고 채우지 않아서였다.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아르카로 가렴."
오랜만에 본 누이에게서 청천벽력 같은 말이 나왔다. 제임스는 땅으로 꺼진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이젠 아예 이 나라에서 내쫓으려는 거구나 싶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린가요?"
"여기 갇혀 있느니 가서 공부라도 하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래. 넌 아직 어리잖니. 여기 윌리엄 왕자님이 네 후견인이 되어주실 거란다."
"공부요? 후견인이요?"
"한창 자랄 애가 궁에만 있어서 뭐하겠니. 무료할 텐데 또래도 만나보고 해야지. 그래도 세인트에서는 공부하기 힘들 테니 아르카로 보내는 거야."
왕후 시해범의 아들이 세인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외국에서 자유롭게 살라는 얘기였다.
그래도 제임스는 혈혈단신으로 갈 것이 두려웠다.
"궁에서나 거기서나 저 혼자라면 세인트에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말만 통하면 친구도 사귈 수 있어."
"학교도 알아놨습니다. 세인트 학생도 좀 있으니 금방 적응하실 겁니다."
"그 애들은 저를 모르나요?"
"너는 바깥에 잘 나서지 않았으니 모를 게다. 그래도 이름은 바꿔야겠지."
아르카로 가면 '화이트'라는 성도 못 쓰는 것이다. 제임스는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네가 동의한다면 다음 주에 바로 아르카로 갈 수 있어. 좀 적응하고 다음 학기에 바로 편입하면 된단다."
"아르카식으로 미카엘이라고 하시는 건 어떠신가요?"
학교도 알아봤다는 걸 보니 자신도 모르게 준비가 다 된 게 분명했다. 제임스가 거절할 구실도 주지 않을 게 뻔했다.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핑계를 대든 그는 아르카로 가게 될 것이다.
차라리 순응하고 평범한 삶을 사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러죠. 마음에 드네요."
"아르카로 가는 것에 동의하는 거니?"
"왕자궁 밖으로 못 나가느니 아예 왕성 밖에서 사는 게 낫지 싶네요."
"그래, 알았다. 출발 날짜가 정해지면 일러주마."
켈리와 윌리엄이 나갔다. 잠시 자리에 머물러 있던 제임스는 물끄러미 서 있던 하인을 불렀다.
"아르카어 교재 좀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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