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수상한 사촌(4)
크레뵈와 르블비안테의 떨떠름한 표정은 자리에 앉아서도 지워지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탁자 한쪽에 세워진 작은 메뉴판을 그들에게 슥 돌렸다.
"마실 것부터 시켜. 오래 있어야 할 것 같으니까."
"있잖아, 카를로스."
"동급생끼리 그렇게 무서워하는 표정 짓지 마. 누가 보면 괴롭히는 줄 알겠어."
존재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지는 걸 어쩌라는 건지. 두 사람도 카를로스가 정녕 열일곱 살이 맞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화난 건지 아닌지 알기 힘든 고저 없는 목소리 때문에 더 그랬다.
끌려온 모양새인 두 영식은 제일 위에 있는 홍차를 주문했다. 다른 차에 비하면 빨리 나오는 편이지만, 오늘은 왠지 느지막하게 서빙되는 듯했다.
카를로스는 두 사람의 홍차가 나오기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셋이서 그 침묵을 감내하던 중 종업원이 차를 두고 떠났다. 휘장이 흔들림을 멈추자 카를로스가 말했다.
"우선 입 좀 축여. 입안이 건조해서 무슨 말이 나오겠니."
"왜 불렀는지 그것부터 말해."
"모의장사에 관한 기획안 말인데."
예상 밖의 말에 입안이 말랐다. 모의장사는 경제 수업에 나온 과제로, 우수 기획은 12월에 진행될 밀라발트 교내 축제에 실제로 장사를 할 수 있었다. 채택된 기획안의 주인에게는 기본 점수에 10점이 더 부과되고, 축제 당일 매출을 포함해 여러 요건을 종합한 추가 점수를 더했다.
잘만 하면 기말고사를 못 보더라도 모의장사에서 얻은 점수가 손해를 메워주기도 했다. 반에서 한 팀씩 선정되어 장사에 참여한 학생 모두에게 점수를 부과하니 누구나 열의를 갖고 참여했다.
르블비안테가 태연한 척 말했다.
"아, 그 과제를 같이 할 사람을 찾는 거야?"
"응, 내가 한 명은 이미 포섭해놨어."
"누군데?"
"아서 로레인."
아주 잠깐 르블비안테와 크레뵈의 표정이 애매한 미소를 그렸다. 그렇게 가깝지도 않은 어색한 녀석과 합심할 수 있을까 싶었다.
두 사람은 카를로스의 말에 어색하게 굳은 얼굴 근육을 폈다.
"아르멘탈리 남작의 사촌이잖아. 여차하면 남작의 도움을 받기도 쉬울 거야."
"너도 남작이랑 친하잖아."
"친하다고 해도 친척만은 못하지. 그리고 우리 둘만 남작의 손을 빌리는 건 반칙이잖아?"
선심을 쓰는 듯한 재수없는 말에도 두 영식은 좋다는 듯 카를로스의 손을 덥썩 잡았다. 어쨌거나 본의 아니게 그를 2왕자라고 오해한 것에 대해서는 흐지부지 넘어가겠지. 얘기도 안 나올 거야…….
"그럼 2왕자에 대해 아는 거 있어?"
"2왕자는 왜?"
"홍보에 어떻게 쓸지 고민하려고."
사교계에 나온 적도 없는 사람인데 홍보는 무슨! 알려진 게 없는 사람을 팔아서 무엇에 쓰겠다고!
역시 이게 진짜 목적이었던 거다. 크레뵈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말해야 자연스러울까?
"어머? 이게 누구야?"
한 귀족 여성이 휘장을 들추고 별실로 들어섰다. 크레뵈와 르블비안테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금발에 주홍빛 눈동자가 눈부신 크렌슈타인 영애였다.
"누님은 어쩐 일입니까?"
"네 친구를 우연히 만나서 같이 오는 길이야. 아서 로레인 맞지?"
"네, 맞습니다. 저희끼리 과제 얘기를 좀 하느라고요."
"그래. 여기서 뵈니 반갑네요, 엑시타 영식, 에뜨라티에 영식."
크렌슈타인 영애의 인사에 둘은 잠시 긴장감을 놓았다. 그녀의 옆으로 아서가 슬그머니 들어왔다. 그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아 보였다.
영애가 카를로스 옆에 앉은 아서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동생에게도 보이지 않는 친밀한 모습에 카를로스마저 놀랄 지경이었다. 흠칫 놀란 떨림이 카를로스에게도 전해졌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아서."
"예, 알테나 영애."
우리도 지금 제대로 보는 영애의 이름을 편하게 불러? 크레뵈와 르블비안테의 의심 어린 눈빛이 아서를 찔러댔다. 셋이서 그러건 말건 카를로스는 설렁줄을 당겨 종업원을 불렀다.
종업원이 도착했을 즈음에는 영애는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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