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수상한 사촌(5)
아서가 카페 차오에 다다르기 40분 전, 크레뵈와 르블비안테가 두려움에 떨며 카페로 향하던 때였다.
밀라발트 교문 앞에 잘 차려입은 귀족 여성이 나타났다.
하굣길 남학생들의 이목을 끈 소녀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한 곳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말을 걸려고 다가가는 학생들도 무시하던 그녀는 찾던 사람을 발견했는지 그제야 발걸음을 옮겼다.
영문도 모른 채 모르는 사람에게 길이 막힌 아서는 옆으로 슥 몸을 피했다. 하지만 여인은 그가 옮기는 방향마다 다 막아 섰다.
아서를 알아본 누군가가 '이젠 학교까지 찾아오네.'라고 쑥떡거리며 지나갔다. 아서는 그 말을 듣자마자 민망함에 어깨를 수그렸다.
"누구신데 이러세요?"
"저는 알테나 크렌슈타인이에요. 카를로스의 누이랍니다."
"아, 제가 카르멘 사교계는 잘 몰라서 못 알아뵈었습니다."
"차차 알아가면 되는 거죠."
알테나의 싱그러운 미소는 주변 남학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서도 그녀의 존재가 익숙해지자 여유를 어느 정도 되찾았다.
"그런데 저에게는 무슨 볼일이시죠?"
"그쪽이 아서 로레인 맞나요?"
아닌 척을 하자니 망설임 없던 걸음을 봐서는 그가 아서임을 분명히 아는 눈치였다. 아서는 설마하니 크렌슈타인가에서 자신에게 해를 끼칠까 싶었다.
"네, 맞습니다."
"요새 카를이 로레인 영식과 자주 어울린다고 들었어요. 이렇게 보니 반갑네요."
"네."
그 뒤로는 그녀에게 할 말이 없었다. 동생과 친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 학교까지 찾아오는 누나라니.
아서는 혹시 자신이 카를에게 뭔가 불편을 끼친 적이 있었나 고민했다. 학교에서 맞고 오자 어떤 녀석이냐며 폴과 쌍둥이가 수업 종이 치도록 저학년 교실 앞에 붙박여 있는 걸 본 기억이 났다.
알테나는 마침 잘 만났다는 식의 말을 꺼냈다.
"지금 어디 가는지 물어도 되나요?"
"카페 차오로 가려고 합니다."
"그래요? 내가 데려다 줄게요. 마차에 타요."
아서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태연하게 말했다.
"동생과 어울리는 사람이 궁금해서 그래요."
그녀의 뒤에 있는 마차에는 익숙한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방과 후에 자주 봤던 크렌슈타인가의 문장이었다.
얻어 타서 나쁠 건 없으니, 아서는 알테나를 에스코트해 먼저 마차에 오르게 했다.
아서는 혈육이 아닌 여성과 단 둘이 마차에 타긴 처음이었다. 알테나는 여전히 속 모를 미소를 유지했다.
"카르멘에서 지내는 건 어때요? 카를이 못되게 굴지는 않나요?"
"제가 카를의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정말 친한가 보네요. 그 애와 어울리는 또래 친구가 많이 없어서 가문에서도 걱정이 많답니다."
딱히 무리를 이끌거나 어딘가에 속하기보다 일과만 끝나면 아르멘탈리 남작저로 달려가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 어느 날에는 아서보다도 먼저 저택에 도착해 있기도 했다.
한창 또래와 인맥 쌓기 바쁜 시기에 여자 꽁무니만 따라 다녀서 되겠냐며 알테나가 중얼거렸다. 아서는 그 말에 다른 말을 얹거나 반박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글로리아의 얼굴에 흙칠하는 것처럼 들릴 것 같았다.
알테나는 시야를 가린 머리카락을 슬쩍 치웠다. 가려졌던 그녀의 주홍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혹시 아르멘탈리 남작에게서 뭐 들은 건 없나요?"
"들은 거요? 글쎄요?"
"카를이 2왕자라는 얘기가 영애들 모임에서도 파다하더라고요."
"그거라면 리아가 알아보고 있을 거예요."
"리아? 아, 남작 이름이 글로리아였죠. 저에게는 아직 허락받지 못한 애칭이라 생소했어요."
대화가 계속 이리 튀었다 저리 튀었다 하지만, 알테나가 말하고자 하는 건 분명했다. 카를에 관한 소문에 아르멘탈리 남작가에서 일조한 건 없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가문의 일원이 아닌 방계를 자극하는 것만 해도 그 가문에 대한 공격으로 비칠 수 있었다. 알테나는 그 점을 감안해서라도 카를의 명예를 지키고 왕족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저택에 불러서 할 수는 없으니 마부조차 듣지 못하게 장벽을 친 마차에서 하는 거였다. 아서는 손바닥에 난 땀을 바지에 슬쩍 닦았다. 이는 알테나의 눈에 곧장 띄었다.
"아, 제 손수건을 빌려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하던 얘기 마저 하시죠."
"어제 남작이 주도한 살롱에 다녀왔어요. 엑시타 영애와 에뜨라티에 영애는 오라비를 대신한다며 사과를 전했고요."
그들 영식이 2왕자의 얼굴을 제대로 본 게 맞는지 확인을 거친 모양이었다. 아서는 내심 안도했다. 글로리아에게 불똥이 튈 일은 이제 사라졌다.
"그 자리에서 남작이 말했어요. 사촌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계속 카를을 추궁할 뻔했다고 말이에요."
'추궁'이라니, 역시 따지려고 부른 게 맞는 걸까? 주변 여성들의 상대적으로 직설적인 화법에 익숙해 있던 아서는 마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알테나는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목소리에서도 계속해서 상냥함이 묻어났다.
"그 사촌이 누군지 보고 싶었어요. 이렇게 보니 경쟁자가 너무 많을 것 같아 걱정이 드네요."
"경쟁자요?"
"알테나라고 불러도 좋아요. 내 동생이 자기 애칭을 허락한 사람이라면 저 역시 그런 호의를 보이고 싶네요."
"네, 알테나 영애."
알테나가 부채로 얼굴의 반을 가리며 웃었다. 그렇게 보니 눈웃음이 카를과 좀 닮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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