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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오래오래/레이스타인

카르멘 5. 남작, 그리고 리아(8)

by 슬기옥 2024. 10. 13.
116화. 남작, 그리고 리아(8)



 

글로리아와 티모시가 마탑을 방문했을 때, 눈 밑 그늘이 턱까지 내려온 남자가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두 사람을 연구실이 모인 층으로 안내하며 중얼거렸다.

 

 

"하…… 뭔 손님이야, 무섭게……."

"네?"

"아닙니다. 카를레나는 아마 여기……."

 

 

남자의 뒤에서 연구실 문 하나가 벌컥 열렸다. 눈이 처진 흑발 여성이 얼굴만 살짝 내밀자 남자가 벽에 샥 붙었다.

 

 

"팔콘 님, 저 찾으세요?"

"허으아아악! 제발 기척을 좀 내!"

"기척은 찾는 사람이 내야죠. 저한테 볼일 있으면 잠깐 마무리만 하고 나갈게요."

 

 

여자는 많아봐야 30대 중반으로 보였다. 글로리아는 그녀의 자색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줄곧 봐온 어머니의 초상화를 떠올린 글로리아는 이내 어머니 역시 같은 눈동자를 가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팔콘이라고 불린 남자는 글로리아와 티모시를 휴게실에 데려다 놓았다. 그는 다시 복도로 나설 때까지 그들에게 차 한 잔 내지 않았다.

 

 

"여긴 손님에게 차도 안 내놓네요."

"그러게. 마탑에 들어가면 사회성이 떨어지나?"

"팔콘 님이 워낙 정신없이 바쁜 분이라 거기까지는 신경을 못 쓰신 것 같아. 괘념치 말렴."

 

 

어느새 나타난 흑발 여인이 날아오는 찻잔에 차를 따랐다. 글로리아의 어깨가 비트게너 공작 앞에서보다 더 경직됐다.

 

카를레나는 거의 처음 보다시피 한 조카 앞에 앉았다.

 

 

"이모에게 보내는 편지치고 너무 격식을 차려서 만나도 될지 고민이었단다."

"그 정도는 해야 예의 바른 조카구나, 하고 만나주실 것 같았어요."

"그래도 그렇지 '안녕하십니까, 샤르트망 거리 아르멘탈리 남작령의 글로리아 리엘 아르멘탈리입니다. 카를레나 리베로 셀빈 연구원님 앞으로 전합니다'가 뭐니?"

 

 

형식적인 안부가 무색하게 딱딱한 편지였다. 본 적도 없는 이모에게 아양을 떠는 성격은 절대 아니었으니까.

 

거래 문서에도 그렇게까지 안 쓸 것인데. 카를레나의 말이 사실인지 부정하지 않는 모습에 티모시가 더 놀랐다.

 

멋쩍게 웃는 글로리아를 보던 카를레나가 말했다.

 

 

"너 타샤 언니를 닮았구나."

"비교 대상이 아버지뿐이라 아버지 닮았단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이목구비 붙은 모양새랑 분위기가 닮았어."

"연구원님도 저희 어머니를 못 본 지 꽤 되지 않으셨나요?"

"그렇다 한들 매일 보는 초상화 속 얼굴을 어떻게 잊겠니."

 

 

글로리아의 얼굴에서 잠시 미소가 사라졌다. 돈독한 자매 사이도 아니었던 듯한데 초상화를 끼고 살기라도 한단 말인가?

 

기분이 이상해져서 곧 그녀는 억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본론을 꺼냈다.

 

 

"영상석 판매 허가를 받으러 왔어요."

"난 네 얘기를 더 듣고 싶은데."

"저희가 그런 사담을 나눌 사이인가 싶네요."

"그래도 난 오늘을 계기로 좀 더 살가운 사이가 됐으면 좋겠는데."

 

 

글로리아가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는 사이, 티모시가 그녀 대신 말했다.

 

 

"저희는 영상석 품질에 대한 마탑의 보증이 필요해요."

"아, 그거. 알아 보니 아르카에서 이미 허가를 구했더구나."

"그건 아르카 내에서의 판매 허가잖아요. 저는 카르멘에서도 팔 거예요."

 

 

몰래 코로 길게 숨을 내쉰 글로리아가 마탑까지 온 목적을 상기했다.

 

 

"이것과 똑같은 물건을 만들려고 해요."

"이게 뭐니?"

"아르민 상단주의 표식이에요."

"너무 훅 들어온다, 얘. 복제품을 만들려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마탑에서는 물건을 함부로 복제하지 않았다. 복제품에는 원본의 가치를 옮길 수 없다는 이유였다.

 

심지어 글로리아가 내민 것은 지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물건이었다.

 

 

"이게 영상석과 무슨 상관이니?"

"영상석으로 이걸 만들어 주세요. 국내에서 허가받지 않은 물건을 마음대로 쓰고 싶지 않아서 겸사겸사 보증도 부탁드리는 거예요."

"너 비트게너 대법관을 만나고 오는 길 아니었니? 영상석에 대한 허가는 그쪽에 받아야지."

"관련 법안 발의를 추진하시겠다고 하셨어요. 이건 그 보증서고요."

 

 

생각 외로 엄청난 시간을 보냈구나 싶었다. 비트게너 공작가의 인장을 확인한 카를레나는 봉투 안을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카르멘에서의 유통을 보장받으려면 이 물건이 뛰어나다는 것을 마탑에서 보증해 줘야 해요."

"뭐 말이야 해보겠다만, 나는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마탑주님이 귓등으로나마 들으실지 모르겠다."

"제가 직접 마탑주를 만날 순 없잖아요."

 

 

영상석 품질 보증과 물건 복제를 말단 연구원인 카를레나가 할 수는 없었다. 카를레나의 연차가 오래되었다 해도 외부인인 글로리아가 마탑주와 대화하기는 요원했다.

 

아무도 모르는 새 들어온 노인을 보고 카를레나가 놀라 펄쩍 뛰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마, 마탑주님?"

"네?"

"지나가는 길에 내 얘기가 들린 것 같아서 말이야. 많이 놀랐다면 미안하군."

 

 

마탑주가 마침 휴게실 근처를 지나다 자기 얘기를 듣고 대화에 끼어들 가능성이 얼마나 된단 말인가.

 

글로리아와 티모시도 저절로 기립했다. 세게 밀린 티모시의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느슨하게 묶은 긴 상아색 머리카락 아래로 양쪽 눈동자 색이 다른 것이 보였다. 오른쪽은 파란색, 왼쪽은 노란색이었다.

 

긴장 속에서 마탑주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나를 찾는다고?"

"마탑주님의 인가가 필요한 일이라서요."

"영상석 인증이라면 예전에 이미 진행했는데?"

 

 

어디부터 들은 건지 글로리아의 방문 목적을 알고 있었다. 글로리아는 잠시 마탑 전체가 마탑주의 고막으로 만들어진 건 아닐까 하고 상상했다.

 

 

"아르카에서 유효한 인증이니 카르멘에서의 판매 인가는 따로 받아야 문제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 그거야 대법관의 보증까지 있으니 문제 없겠지. 하지만 상단주의 표식처럼 중요한 물건을 영상석으로 만드는 이유가 뭐지? 뭔가 다른 일을 꾸미고 있는 건가?"

"저희 아르민 상단을 지키기 위한 일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손을 더럽히는 일도 마다하지 않지. 자네가 하려는 일이 그런 종류라면 복제는 절대 허가할 수 없네."

 

 

글로리아는 카를레나를 만나기 전보다 더 두터운 막막함을 느꼈다. 2왕자의 탄신연은 이제 고작 이틀 뒤였다.

 

 

"제 친구도 걸린 일이에요. 상단과 친구를 잃을 수 없어요."

"그래서 무슨 수작이기에 상단주의 표식을 이용하는 건지 이해가 잘 안 가는군."

"아르민 상단을 갈취하려는 자들이 있어요. 그들을 오히려 이용할 생각이에요."

 

 

정확한 정보는 누구에게도 흘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안젤로의 이모이기도 한 카를레나 앞에서는 더욱 말할 수 없었다.

 

안젤로는 카를레나를 달가워하지 않지만, 카를레나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를 일이니까.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조카와도 대화 자리를 만드는 사람인데, 같이 살아온 언니 아들이라면 껌뻑 죽을지도 몰랐다.

 

 

"상단주의 표식이 아니라 다른 물건이라면 고민 없이 들어주겠네. 그러니 지금 생각하는 계획은 수정했으면 하는군."

"아르민 상단은 저희 증조부께서 아르멘탈리 남작가에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오시고 지금에 이른 거예요. 그런 소중한 가문의 유산을 제가 잘 보존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요."

"상단을 지키겠다면서 상단을 미끼로 쓰겠다는 건가? 희안한 전략이군."

 

 

마탑주의 지적에 글로리아는 계획을 수정해야 하나 싶어졌다.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패도 조금은 보여야 했다. 그걸 보여줄 수 없으니 감정에 호소하게만 되었다.

 

자신을 잘 모르는 상대에게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으면서 무작정 밀어붙이면 꼴만 우스워지리라.

 

 

"그럼 다른 장식품을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모양은 제가 지금 그려 드릴게요."

 

 

문득 마탑주는 탁자에 늘어뜨려놓은 돌들을 바라보았다. 가공 전 보석 원석으로 보이는 영상석이었다. 상단주의 표식에 달린 것과 같은 색인지 온통 페리도트와 비슷한 색감이었다.


마탑주의 머릿속에 오래전에 들은 말이 떠올랐다.

 

 

"그분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내 마력이 다해도 좋아."

 

 

남을 위해 벌이는 무모한 짓이 자신을 수렁으로 빠뜨릴지언정 대상의 미래를 지킨다. 이 영상석 제작에도 그런 기저가 깔려 있었다.

 

이 소녀는 일을 벌이기 전 방어막을 쌓기 위해 여기 온 것이었다. 기반을 다지고 벽돌을 올리러 온 소녀를 막는다면 본인이 벽이 되는 것도 감수할 듯했다.

 

마탑주는 글로리아의 성향을 모르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되었네. 혹시 그 표식을 본 다른 사람이 있는가?"

"후계자 외에는 보지 못합니다. 상인협회의에 가는 일 외에는 외부에서 착용하지도 않고요."

"그 모임에 참석하는 인원이 연관되어 있나?"

"그건 아닙니다."

"그럼 모양이 어떻든 상관없겠군. 누구에게 쓸지는 모르지만, 그 자가 상단주의 표식이라고 믿기만 하면 되겠지?"

 

 

이후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수정하던 글로리아는 수그러지던 어깨를 폈다. 모양을 똑같이 만들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발상을 바꾸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졌다.

 

마탑주는 옅은 미소를 보였다.

 

 

"이제 나는 '상단주의 표식'을 모르는 것이네. 알겠나?"

"어, 감사합니다. 근데 제 부탁을 들어주시는 이유가 있나요?"

"언제 써야 하는지나 알려주게."

"지금 당장이요."

"빨리도 왔군."

 

 

마탑주가 등판했을 때는 얻는 것 없이 쫓겨날 줄로만 알았다. 카를레나는 당연히 그녀를 보호해 주지 못할 것이었고.

 

마탑주의 결정에 카를레나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마탑주가 휴게실을 빠져나가자 카를레나가 속삭였다.

 

 

"너 하는 짓은 타샤 언니랑 딴판이구나."

"아버지 닮았다는 말 많이 들었다니까요?"

"으음, 당연하겠지. 마탑주님이 무슨 생각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됐다."

 

 

혹시나 마탑에서 어마어마한 청구 영수증이 온다고 해도 글로리아는 놀라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