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행복하게 오래오래/레이스타인

카르멘 5. 남작, 그리고 리아(12)

by 슬기옥 2025. 2. 8.
120화. 남작, 그리고 리아(12)



 

온갖 가문의 어린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카를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물론, 카를과 함께 몇 년이나 수학한 밀라발트 학생들은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기까지 했다.

 

카를은 계단을 내려와 천천히 글로리아에게 향했다. 카를을 알아본 귀족들은 동시에 하나의 의문을 떠올렸다.

 

 

'아르멘탈리 남작은 친구의 정체를 알고 있었는지?'

 

 

글로리아는 일단 예를 갖춰 인사했다.

 

 

"카르멘의 두 번째 별을 뵙습니다."

"자네를 여기서 보니 반갑네, 아르멘탈리 남작."

 

 

파트너인 1왕자도 자신에게 존대를 하는데, 거리낌 없이 반말을 하는 모습에 글로리아는 잠시 헛웃음이 나오려던 것을 참았다.

 

이게 맞는 건데. 새삼 다니엘이 얼마나 자신에게 바람을 불어 넣었는지 확인하니 입맛이 썼다. 친구 사이에도 어려운 느낌이 드는 게 왕족인 것인데.

 

마침 다니엘이 슬그머니 글로리아의 앞을 막아 섰다.

 

 

"꼭 다른 데서 아르멘탈리 남작을 본 것처럼 말하는구나. 요 몇 년간 궁에서 칩거했잖니."

"저라고 바깥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영식 영애들은 '그래, 쟤라고 알았을 리 없지.'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카를이 어정쩡한 분위기를 전환했다.

 

 

"그럼 연회를 시작하죠. 다들 잘 즐겨 줬으면 합니다."

 

 

음악이 연주되자 멋쩍게 있던 사람들 몇 명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물론 가까이 지내는 무리끼리 뭉쳐서 카를에 관해 추측하는 대화를 하느라 춤에 집중하지 못할 것이다.

 

카를이 글로리아에게 손을 내밀자, 다니엘이 그 손을 밀어냈다.

 

 

"아르멘탈리 남작은 내 파트너인데 첫 춤도 당연히 나와 춰야지?"

"그럼 다음 춤은 저와 추면 되겠네요."

"아니, 그다음 차례도 나야."

"곧 성년이 될 아우와 비슷한 수준으로 받아치시면 곤란한데요."

 

 

형제의 눈빛이 날카롭게 부딪쳤다. 그 이상으로 대치하면 곤란했기에 글로리아는 다니엘의 팔을 살짝 잡아 끌었다.

 

 

"에스카르고 저하와는 추후 대화 나누겠습니다. 오늘은 다니엘 저하의 파트너로 참석한 거라서요."

 

 

어차피 자정까지는 그와 있어 봐야 오히려 작전 수행에 지장이 생길 것이었다. 카를은 글로리아의 단단한 눈빛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글로리아가 다니엘과 춤추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는 아서에게 바이올렛이 말을 걸었다.

 

 

"첫 춤은 자기 파트너랑 추는 거야."

"아, 그렇죠."

 

 

아서는 사교회장에 잘 나서지 않는 성격이었다. 열네 살에 처음 연회장에 참석했다가 또래 영애들의 열렬한 눈빛에 겁을 집어먹고 돌아갈 정도였다.

 

이후 그가 연회장에 가는 건 왕실 행사가 있을 때뿐이었다. 아서 로레인 영식이 입장한다는 말만 나오면 영애들은 그의 파트너가 누구인지부터 확인했다.

 

파트너를 대동한 건 이번이 처음인 아서가 연습한 대로 바이올렛의 손을 잡았다.


춤을 추며 글로리아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다니엘이 주변 소리를 차단했다. 고요 속에서 글로리아가 어리둥절한 듯 그를 올려다 보았다.

 

 

"저에게 영 집중을 못 하시는군요."

"네? 제가요?"

"제 동생에게서 눈을 못 떼는데, 에스카르고도 이쪽을 보네요."

 

 

글로리아가 카를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친 카를이 시선을 피했다.

 

 

"제 친구가 2왕자님이었다니 믿어지지 않아서 그렇죠. 카를도, 아니, 에스카르고 저하도 제게 미안하신가 보네요."

"그대도 충격이 크겠군요."

"그럼요. 몇 년을 알고 지냈는데."

 

 

서로 이렇게 쳐다봐서야 숨긴 의도를 들키겠다 싶어, 글로리아가 화제를 돌렸다.

 

 

"저는 정말 저하의 비가 되나요?"

"조만간 공식으로 발표할 겁니다."

 

 

"그렇다."라고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글로리아는 정확한 답을 요구하는 대신 진짜로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저하와 결혼하면 제 작위는 어떻게 되나요?"

"지금 작위는 다른 가족이 잇게 될 거예요. 왕자비는 작위가 없으니까."

 

 

그녀에게 작위를 물려준 아버지 게오르그의 뜻을 잇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글로리아의 안색이 잿빛이 되었다.

 

다니엘이 농담처럼 덧붙였다.

 

 

"이혼하면 그에 준하는 작위가 주어지긴 하죠. 물론 이혼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제 지금 작위를 다시 받는 게 아니라요?"

"그땐 다른 사람이 가주일 테니까요."

 

 

결국 '아르멘탈리 남작'이라는 이름은 잃는 거였다. 그녀라면 높은 확률로 메리나 실비아에게 작위를 넘길 것이다. 작위를 넘기기로 결정하기까지 또 많은 시간을 고민할 것이 분명했다.

 

글로리아는 춤을 마무리하며 표정을 숨겼다. 다음 춤 상대도 다니엘이라고 했던 유치한 발언이 떠올랐지만, 파트너를 바꿔 가면서 춰야 했다.

 

그래야 세실이 충분한 증거를 담은 가짜 상단주의 표식을 가져오기 수월할 테니까.

 

글로리아가 자신의 손을 아예 놓자 다니엘도 소리 차단 마법을 해제했다.

 

 

"저보다 나은 상대를 발견했나 보군요?"

"여기에 저하를 능가하는 사람이 있겠나요?"

"글로리아의 눈에는 충분히 있을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하는 다니엘의 시선 끝에 카를이 있었다. 하지만 인사 후 떠나는 글로리아의 다음 상대는 다른 사람이었다.

 

갑자기 2왕자라는 정체가 밝혀진 친구에게 감히 다가가지 못하는 신하인 척해야 했다. 아무리 겁없는 사람이라 해도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지기엔 왕족을 대한 경험이 부족했다.

 

글로리아는 춤을 추면서 은근히 주변을 살폈다. 파트너의 눈을 보는 척 뒤편으로 안젤로가 지나가진 않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안젤로도 은밀하게 움직이는지, 그 관심종자가 눈에 이렇게 띄지 않는 건 의외였다. 그러고 보니 다니엘도 어느 새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챘다.

 

글로리아는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한참 춤을 추고 목을 축이던 사이, 자정이 되었다. 2왕자로서 카를은 다시 사람들 앞에 섰다.

 

 

"내 탄신을 축하해 주러 온 모두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네. 누군지도 모를 텐데 2왕자 한번 보겠다고 온 것에 대한 보답은 해야겠지."

"저희는 2왕자 저하를 뵌 것 자체가 선물입니다."

"빈말이라도 고맙군, 에뜨라티에 영식."

 

 

카를에게 갑자기 성으로 불린 크레뵈는 그전보다 더한 거리감을 느끼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입 속으로 '어, 미안……' 하고 중얼거리며 아서의 뒤로 슥 숨었다.

 

그때 연회장 한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세실리아 셀빈! 이 미친 것! 어디로 숨었어!"